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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재하 사망 이유 작품활동 나이 프로필 고향 결혼 김현식 노래
    카테고리 없음 2022. 9. 15. 19:15

    

    유재하 34주기·김현식 31주기..명곡 남긴 천재 뮤지션들
    - 2021.11.01.

    한국 대중음악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가수 고(故) 유재하와 김현식이 각각 34주기 및 31주기를 맞았다.


    1962년생인 유재하는 지난 1987년 11월1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25세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유재하는 1984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키보드 연주자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뒤, 김현식과 함께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함께 활약하기도 했다.

    한양대 작곡과 출신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유재하는 1987년 자신의 1집이지 유작 앨범이 돼버린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했다. 생전 한 장의 앨범을 남겼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 내 품에' '가리워진 길' '내 마음 속에 비친 내 모습' '우울한 편지' '지난 날' 등 주옥같은 명곡들이 실려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사후 유재하의 아버지는 그의 음악적 성과를 기리기 위해 음악 장학회를 설립했고 장학회 주관으로 지난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열렸다. 이 경연대회를 통해 조규찬 유희열 김연우 정지찬 등 뮤지션들이 탄생하게 됐다. 올해 본선대회는 오는 11월13일 온라인으로 진행될 예정이랍니다.

    1958년생인 김현식은 1990년 11월1일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1980년 데뷔한 김현식은 사망 전까지 솔로 및 밴드 봄여름가을겨울 등을 통해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내사랑 내곁에' '골목길' 등 여러 히트곡을 남겼다.

    그는 간경화 투병 생활을 하며 6집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 앨범은 사후에 발표, 200만장 판매고를 올려 골든디스크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특히 가수 권인하와 김장훈은 김현식 사망 31주기를 맞아 이날 김현식 추모 공연을 개최한다. 생전 고인과 절친한 사이였던 권인하와 김장훈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라이브클럽 아이해브어드림에서 밴드 공연 콘셉트로 '김현식 추억 콘서트'를 펼친다. 이날 공연은 오후 8시 네이버TV를 통해 만나 볼 수 있다

    - 가수 유재하 프로필 경력 이력 누구

    출생 나이 생일
    1962년 6월 6일
    고향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 620

    사망
    1987년 11월 1일 (향년 25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강변북로(한남대교 북단)

    장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로 154-62

    가족관계
    아버지 유일청(柳一靑)(1922~1989) 어머니 황영
    형 유청하(柳晴夏), 유정석(柳政錫)
    누나 유은순(柳銀順), 유은주(柳垠朱), 유은미(柳銀美)
    여동생 유지수(柳知秀)

    학력
    은석국민학교 (졸업)
    삼선중학교 (졸업)
    대일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 학사)

    소속 밴드
    위대한 탄생
    봄여름가을겨울

    종교
    가톨릭 (세례명: 미카엘)
    병역
    방위병 복무 추정

    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다.

    짧은 생애와 단 한개의 앨범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야말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가수. 그의 데뷔작이자 유작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지금 들어도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고 단아한 앨범이다. 어눌하지만 솔직한 보컬, 절제를 아는 세션, 간결하고 담백한 가사가 인상적이랍니다.

    2008년경 MBC 창사 47주년 특집 MBC FM4U의 '한국 대중음악, 시대를 걷다'에서 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대한민국의 발라드는 이영훈에 와서 문이 열리고 싱어송라이터의 세계, 즉 창작과 작곡, 편곡의 세계로 발라드의 지평으로 올린 사람이 유재하다."라고 평가했답니다.

    - 일생과 과거, 그리고 현재

    1962년 6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現 안동시 풍천면 하회1리) 하회마을에서 유창물산(裕昌物産)주식회사 사장을 지낸 아버지 유일청(柳一靑)[7]과 어머니 창원 황씨 황영[8] 사이의 3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숙부 유시목(柳時沐)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의 14대손으로,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미카엘이다. 서울 대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 진학하였답니다.

    

    소박한 이미지와는 달리 김광민 등 생전 유재하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의외로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여러가지 루머가 있는데 실제로는 큰 탄광을 경영하는 사업가 집안이었다.


    순수음악을 전공했다.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 과제로 제출하기 위해 작곡한 곡을 보고 교수가 "아무리 급해도 모차르트를 베껴 오면 어떻게 하냐"고 혼을 냈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음악이 모차르트만큼 훌륭한 나머지 교수가 착각했다는 뜻이다. 그의 데뷔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의 수록곡들 중 5번 트랙 "Minuet"는 아예 고전음악이다.

    대중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작곡과 작사, 편곡 외에도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의 연주에 능통했던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84년 클래식과 재즈를 대중 가요에 접목하는 음악적 지향점을 세웠다.

    한양대 재학 중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10] 이때 조용필은 나중에 유재하의 대표곡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 를 자신의 7집 앨범에 먼저 취입했다. 하지만 조용필의 일본 공연 동행에 필요한 학교의 허가를 받지 못하여 위대한 탄생에서 탈퇴하게 된답니다.

    최고의 히트곡이자 명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사실 조용필의 앨범에 먼저 수록되어있다. 7집이 발매되기 약 반년 전인 1984년 11월 일본에서 발매된 조용필의 <아시아의 불꽃> 앨범에 한국어 버전과 일본어 버전('芙蓉の花のように') 두가지로 먼저 실린 것. 이것은 유재하의 곡 중 최초로 레코딩된 버전이다. 그런데 양인자 작사 조용필 작곡으로 표기되어 있다.

    7집 발매 당시인 1985년 '위대한 탄생' 의 멤버였던 23살 새파란 청년 유재하의 재능을 꿰뚫어본 조용필이 "너 곡 좀 써봐라" 라고 이야기하고 유재하가 감격해서 1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한 곡만 쓰여서 유재하가 실망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런데 봄여름가을겨울은 이 에피소드를 조용필이 아닌 김현식과 연관 지어 얘기한 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김현식 관련 문단을 참조할 것이랍니다.

    당시 위대한 탄생의 리더였던 베이시스트, 편곡자, 프로듀서인 송홍섭은 이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다. 송홍섭이 유재하의 집에 방문하게 되었을 때 유재하가 그에게 자신의 노래를 조용필이 부를 수 있도록 소개해달라고 부탁했고, 악보를 전해 받은 조용필이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장조 발라드의 곡이라며 유재하 곡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녹음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재하가 조용필에게 준 곡은 '사랑하기 때문에'와 '우리들의 사랑'. 다만 유재하는 조용필이 녹음한 '사랑하기 때문에'를 듣고는 본인이 생각한 곡의 정서와 맞지 않아 아쉬워했다고 한답니다.

    

    수록곡 중 하나인 '우리들의 사랑' 악보, 조용필에게 주었던 버전이다. 악보 상단에 적힌 2절 도입부 가사를 보면 현재 불리는 가사와는 다른 부분이 보인다. 1983년 이문세의 앨범인 운수 좋은 날에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가 수록되어 있다. 유튜브에 찾아 보면 음질이 좋지가 않다.

    위대한 탄생 시절 공연 영상. 52분 25초부터 약 20초간 단독 샷이 나온다. 오랫동안 유재하의 방송 출연은 젊음의 행진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위대한 탄생 활동 당시의 방송을 찾아보면 더 나올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재하 본인부터도 전화로 지인들에게 "나 티브이에 나와! 꼭 봐!" 라고 좋아라 전화하던 게 젊음의 행진에 나오던 거였듯이 본인은 슬쩍 말없이 얼굴 나오는 출연에 대하여 그것도 출연한거냐? 싶은 듯 하다.


    한양대 졸업 후 1986년에는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하였다. 라디오 스타 김현식 특집에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당시 3집을 준비 중이던 김현식이 멤버들에게 곡 좀 써오라고 하니까 유재하가 그때까지 자신이 썼던 자작곡 10여곡을 다 가져다 줬다. 그런데 형평성 맞춘다고 멤버당 한 곡씩만 넣는다고 하자 유재하가 삐져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나갔다고 밝혔다. 이때 김현식이 받은 곡은 희대의 명곡이자 유재하 1집의 수록곡인 <가리워진 길>.(이후 김현식은 유재하 사후, 추모의 의미로 <그대 내 품에>를 자신의 4집에 수록했다.) 그리고 유재하의 대타로 급히 영입된 박성식이 김현식 3집 때 내놓은 곡 또한 희대의 명곡인 <비처럼 음악처럼>이다. 다만 유재하가 밴드에서 나간 뒤에도 김현식과 유재하는 술친구로서 서로 잘 지냈다고 한답니다.

    어쨌든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고 싶었던 유재하는 돈 800만 원을 들여서 자신이 모든 곡의 작곡, 작사, 편곡을 한 솔로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1987년 8월에 서울음반을 통해 내놓는다. 당시나 지금이나 악기 한 두개씩 다루거나 미디를 하고 작사, 작곡을 할 수 있는 싱어송라이터들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악기 편성과 리듬, 코드 진행, 형식, 편곡에 노래, 앨범 컨셉까지 주위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다 해낼 수 있고 자신뿐 아니라 다른 아티스트들의 프로듀싱이 가능하며 대중의 인정까지 받은 이들은 유정연, 장기호, 김현철, 윤상, 신해철, 유희열, 김동률, 정원영, 조동익, 고찬용, 나원주, 정재형, 박용준 (The Classic), 이승환(작곡가), 정재일 등을 제외하면 극히 드물답니다.

    신중현이나 조용필같은 가요계 거장들도 하기 힘든 작업을 유재하는 만 25살에 한 앨범 통째로 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유재하는 클래식 작곡 전공자 출신이었기에 그 어렵다는 관현악 오케스트레이션까지 했다. 드럼, 베이스와 오케스트라 반주를 제외하고는 피아노, 키보드, 기타 등 스스로 스스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들도 모두 자신이 맡았다.

    오케스트라 반주 역시 유재하가 대학교를 다니면서 알게 된 후배들이나 지인들을 섭외해 녹음했다고 한다. 당시 유재하 앨범의 반주를 연주했던 후배들은 처음에 대중 음악의 반주를 녹음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당시 클래식 음대에서 학생들이 대중음악을 하는게 교수들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바로 퇴학 조처를 당하게 되어있었다. 1982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잃어버린 우산’으로 동상을 수상한 가수 우순실 씨도 한양대 작곡과에 재학중이었는데 가요제 출전 후 제적 통보를 받았다. # 그래서 '이런 거 해도 되나? 이러다 걸리면 학교에서 짤리는 거 아냐?' 식으로 연주자들사이에 걱정도 많았다고. 유재하는 그런 후배와 지인들을 다독여주면서 앨범 녹음을 무사히 끝냈다. 실제로 사랑하기 때문에에 수록된 상당수의 곡들은 이미 유재하가 한양대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당시 연습실에서 만들어졌으며 친한 동기들과 선후배들 앞에서 일종의 프레젠테이션처럼 연주를 해주기도 하였답니다.

    오늘날 유재하가 수많은 후배 가수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이런 예술 작품을 만드는 듯한 정성스러운 자세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의 앨범은 시대를 초월한 세련되고 감동적인 음악으로 대중음악 뿐 아니라 대중음악을 금기시하던 클래식 음악계의 대중음악을 바라보는 시선까지도 바꾸어 놓았답니다.

    사실 이 앨범이 처음 나왔을 때도 이래저래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가창력 미달을 이유로 출연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의 평론가들은 클래식과 가요를 접목한 유재하의 앨범을 높게 평가하지 않고 "이상한 노래" 정도로만 치부했다. 당시에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TV 가요 프로그램에 나가기 전에는 PD들에게 사전에 테스트를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 테스트에서도 가창력 미달을 이유로 번번히 통과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는 라디오를 통해 청취자들의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이문세가 진행하는 MBC 라디오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는 한 주간의 신청 엽서와 방송 횟수를 집계해 가요 순위를 선정하는 '별밤 차트'란 코너가 있었는데, '지난날'이 기록적으로 장기간 1위를 질주하기도 했었다.

    한편 당시에는 팝송이나 클래식 음악을 고상한 문화예술로 치는 반면 가요는 대중 오락의 한 종류로만 치부하는 분위기였고, 클래식 전공자들 입장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던 유재하가 대중 가요를 만든다는 건 고상한 문화 음악을 포기하고 질 낮은 딴따라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유재하는 학교를 그만둘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그 여성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때려칠까..." 라고 유재하가 말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유재하가 1집을 녹음하기 직전 지인들이 유재하에게 작곡한 음악을 들려 달라고 부탁하여 유재하의 음악을 들을 때면 항상 유재하는 자신의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아요 형편없죠…" 하며 푸념했다고 한답니다.

    이 외에도 여러 에피소드가 있다. 유재하의 앨범 녹음 과정을 참관했던 여성의 증언에 따르면(명작스캔들 참조) 무척 수줍어하고 조용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술을 조금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면서 쾌활해지는 성격이었다고. 유재하는 술만 마시면 말도 많아지고 피아노가 있는 술집에 가면 끝도 없이 즉흥 연주를 계속했다고 한다. 주인들이 나중에 참지 못하고 나가라고 할 때까지…

    한편 김현식의 소속사 사장이자 유재하를 데뷔시킬 뻔 했던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유재하의 성격을 개그맨에 비유할 정도로 밝고 쾌활한 타입이라고 소개했고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주위 사람들이 처음 보면 '바람둥이'같이 보일 것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여성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던 면모를 소개하기도 했다.

    한영애는 유재하의 일화를 공개했는데, 유재하는 항상 대중음악인들과 소통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유재하한테 팬레터가 왔을 때에 그는 모두 모아놓으라고 하였고, 어제 뭐했냐는 질문에 팬레터 답장 쓰느라고 밤 꼬박 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유재하의 쾌활하고 순진한 성격을 알 수 있다.

    천주교 신자로서 가톨릭 교회에 다녔는데, 성당 앞에 레코드 가게 주인에게 당시 유재하가 앨범 내기 전에 데모 테이프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가게 주인은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가장 괜찮다고 했고, 유재하도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 안타까운 사망

    그러다가 1집을 발표한 직후인 1987년 10월 31일 저녁에 웬일인지 잘 가질 않던 동창회를 갑자기 간다고 나섰답니다.

    다음 날인 11월 1일 새벽에 술에 취한 친구가 몰던 포니2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 차가 용산구 한남대로 근처 강변북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여, 마주오던 택시와 정면 충돌하는 바람에 25세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후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現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천주교 용인공원묘원에 안장됐다. 유재하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를 만났던 사람에 의하면 유재하는 1집의 완성도에 아쉬워했고 만약 2집을 발매할 수 있다면 그 앨범은 더 좋은 앨범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강한 의욕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음주운전을 하던 친구 성 모씨도 이 사고로 숨졌으며 유재하 유족들은 음주운전자의 아버지 성씨와 충돌한 택시 업체인 한도콜택시를 상대로 4억 1,600여 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1988년 8월 3일 서울민사지법 합의 15부에서는 "승용차를 모는 친구가 술에 취한 것을 알고도 같이 타고 가다 사고가 났으면 피해자도 50%의 과실이 있다"며 "피고 성씨는 유씨 가족에게 4,460여 만원을 지급하면 된다"고 판결했답니다.

    

    KBS 젊음의 행진에 나와 1집 앨범 수록곡인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부른 영상이 남아 있는데 이게 유재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송에 가수로서 출연한 모습이다 방송에 꼭 나가고 싶어했던 유재하는 알고 지내던 한영애에게 "누나 나 방송 나가!" 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한영애는 유재하 자신의 앨범에 싣지 않은 2곡을 받은 뮤지션 중 하나. 나머지 한 곡은 이문세가 받았다. 한영애가 받은 곡은 '비애'라는 노래이다. 한영애 2집 바라본다에 수록되었고, 이문세가 받은 노래는 '그대와 영원히'다. 이문세의 3집 앨범인 난 아직 모르잖아요에 수록되었답니다


    유재하 사망 직후 라디오에서는 갑자기 '사랑하기 때문에'와 '지난날'이 정말 물릴 정도로 많이 나왔다. 생전에 크게 대중적인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후 오히려 인지도가 올라가며 뒤늦은 인기를 얻었다는 것이 더욱 사실에 가깝다.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에 실린 곡들은 사실 유재하 자신의 자전적인 사랑 이야기로, 유재하가 곡을 바친 주인공은 바로 해당 앨범의 기악 파트 중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을 담당한 김애란이라는 여성 연주자라고 한다.

    세간에는 한동안 한양대학교 1학년 때 그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그녀는 초등학교 동창이었으며 대학에서 기적처럼 재회했음이 라디오스타 유재하 편과 본인이 먼 지인이라고 주장하는 유튜브의 몇몇 댓글에 의해 밝혀졌다.

    라디오스타 유재하 편에서 피아니스트 김광민에 따르면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그녀를 대학에서 만나 쓴 곡이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라고 한다.

    어찌어찌 해서 결국 그녀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다고. 유재하가 죽자 당시 사귀는 중이었던 이 여성은 큰 충격을 받고 한동안 잠적하며 은둔 생활을 하며 깊이 슬퍼했답니다

    그렇게 몇 해동안 살다가 보다 못한 부모가 애가 타 해외 여행이라도 하며 안정을 취하게끔 했다고 한다. 그러다 스위스로 여행을 가서 한 카페에 들렀는데 난데없이 카페에서 유재하 노래가 나와서 기겁했다고. 카페 주인에게 이 노래에 대하여 묻자 한 한국인 여행자가 준 음반인데 가수나 가사는 몰라도 너무 애절하여 종종 틀어준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유재하와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한양대 후배였던 한 저명 작곡가의 증언에 의하면 김애란이 나중에 좋은 짝을 만나 다행히 해피엔딩이 되었다고 한다. 다름 아닌 90년대 초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광민과 함께 일요 (수요) 예술무대를 만들어 우리 대중음악의 수준을 격상시켰고, 유재하와 한양대 작곡과를 같이 다니기도 했던 한봉근 PD의 친남동생과 결혼한 것이다. 주위에서도 이같은 소식에 깜짝 놀랐다고 하는데 유재하와 김애란을 둘 다 아낀 한봉근 PD가 소개한 듯 하다. 한 여인이 진심으로 사랑한 연인을 잃은 깊은 상처로 몇 년간을 눈물로 방황하다 다시 사랑으로 인생을 치유한 아름답고 축복할만한 일이다.

    유재하 사망 당시 65세였던 아버지 유일청 씨나 61세이던 어머니 황영 씨도 자식 잃은 슬픔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이를 보면 알겠지만 유재하는 요즘 기준으로도 엄청난 늦둥이로 태어났는데 아들이 음악 좋아하여 연주하는 걸 시끄럽다고 꾸짖은 게 두고두고 한이라고 1988년 한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언급했다. 당시 아들의 생전 음반 연주 사진을 방구석에 두고 말없이 쳐다보던 아버지 사진이 이 잡지를 보던 유재하 팬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해당잡지 스캔자료[20] 결국 유재하의 아버지는 한에 사무쳐 2년 뒤 세상을 떠났답니다.

    명곡 <사랑하기 때문에>의 중간에 들어가는 깔끔하고 가슴 쓰라린 기타 연주나 <우울한 편지>의 우울한 피아노 간주는 2020년대 기준으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조용필, 이문세, 김현식같은 선배 가수들이 왜 그렇게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는지는 앨범 한 장으로 명료하게 드러난다.

    김현식 등 당대 음악 선배들이 유재하를 그토록 아꼈던 이유는 당시 기준으로 대중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음대 출신(게다가 명문대) 음악가 후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대중음악계의 환경이라는 건 개인의 음악성과 음악을 만드는 기본기가 전혀 딴판이어서 대부분의 대중 가수들 중 일부를 빼놓고는 악보를 그려서 작곡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악보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가수도 많았었던 시대였다. 그렇게 제대로 된 음악 교육 기회 없이 그저 개인이 가지고 있는 ‘끼’와 '삘'로만 음악을 하고 있었는데 한양대 음대 작곡과 출신이 대중 가요를 한다고 나타났으니 선배들 입장에서는 대중음악계에 큰 기대주였던 셈이라빈다.

    특히 김현식은 유재하를 무척 아꼈다. 김현식은 후배들을 폭력으로 이끄는 스타일이었는데, 김종진이나 전태관 등 당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였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유재하는 항상 그 구타와 집합의 대상에서 열외였다고 한다. 평소 가요계 군기반장이자 성질 있기로 유명한 김현식이 얼마나 유재하를 높게 평가했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김현식은 유재하 3주기인 1990년 11월 1일에 간경화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김현식이 유재하가 세상을 떠난 이후 슬픔에 빠져 술을 가까이 하다가 간경화를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두 뮤지션에게 바치는 헌정곡으로, 2004년 에픽하이가 '11월 1일'이라는 노래를 자신들의 정규 앨범에 수록했다. 두 뮤지션의 기이한 인연을 모르는 젊은 음악 팬들도 해당 곡을 듣고 비화를 알게 된 케이스가 상당히 있었다.

    그리고 신승훈이나 윤종신, 김현철 같은 가수들이 유재하의 영향을 받아 그의 음악을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이문세의 경우에는 유재하가 생전에 전혀 유명한 가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라디오 방송에서 울면서 뉴스를 전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재하 노래 <지난 날>에서 이문세가 바로 코러스로 참여하기도 했고, 유재하는 죽기 전에 이문세에게 노래를 한 곡 써주었다.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가 실린 이문세 3집에 그대와 영원히가 그 노래이다. 3집 녹음 당시 이문세는 당대 최고 가수가 아니라 1, 2집의 실패로 인한 아쉬운 가수였다. 이문세의 히트가 3집 이후이니 이문세의 황금앨범(3, 4, 5집)대열에 그대와 영원히라는 뛰어난 곡으로 서막을 여는데 참여했다고 보는 게 맞답니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사가 유재하 이전과 유재하 이후로 나뉜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그의 음악적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음대 작곡과 출신답게 그의 음악은 기존의 대중음악과는 사못 다른느낌을 주는데 쉽게 말해 기존 대중가요가 일률적으로 가졌던 소위 '뽕끼' 가 그의 음악에서는 완전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21]. 그의 노래 대부분이 다소 슬프고 애잔한 느낌을 주지만 이전의 가요처럼 신파조는 아니다. 오히려 슬프지만 무언가 깔끔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한국 가요 발라드계의 양대 원조격인 이영훈의 음악들조차 사실 저 '뽕끼' 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뽕끼' 라는 것이 다소 신파적인 멜로디를 선호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순전히 단점이라고 볼 수만은 없답니다.

    그러나 유재하의 경우 한국 가요계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장르를 20대 중반의 나이에 새롭게 길을 텄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단순하게 봐도 조용필이라는 전무후무한 황제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던 가요 지평에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이어지던 발라드의 두 시초라는 것에 대단한 점이 있ㄷ바니다.

    이문세-변진섭-신승훈으로 이어지는 한국형 발라드 계보의 시발점은 이영훈과 유재하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2021년 SBS에서 방송한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에서는 실제로 이영훈과 유재하를 한국형 발라드 계보의 시초라 평가하는 방송을 진행하였다. 특히 여기서 강조한 점은 발라드에 팝적 요소를 가미하고, 브릿지 부분을 도입한 것을 그의 업적으로 바라봤답니다.

    후배 가수들, 특히 발라드 가수들에게 끼친 영향이 상당하다. 사실 소위 말하는 현대의 한국 발라드는 지금도 유재하 1집과 이영훈이 전곡을 작사/작곡한 이문세 4집, 5집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음악적 성과가 적기 때문에 (1집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뒤에 기량이 떨어진 가수들과 비교되며) 아쉬움이 더해진 약간의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 활동 이전부터 조용필, 김현식 등 거장들에게 인정을 받기도 했고, 그런 그가 겨우 1집밖에 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으니 당연히 동료 가수들의 아쉬움이 더해졌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작곡/작사 능력에 비해 가창력이 아쉽다는 평도 있는데 이는 유재하의 경력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인게 자신의 1집 앨범을 제외한 음악인생의 대부분을 가수 유재하가 아닌 작곡가 유재하로 보냈으니 상대적으로 다른 가수들보다 가창력이 떨어져도 무리는 아니다.

    특히 늘 같이 묶이는 가수가 유재하처럼 젊은 시절에 요절한 김현식과 김광석, 그리고 신해철이라 좀 더 대비되는 면이 없지않아 있다.[23]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1997년, 조규찬 등이 참여한 그의 추모 앨범인 "다시 돌아온 그대를 위해"가 제작되었다. 물론 이 앨범도 서울음반을 통해 출시됐다.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 '우울한 편지'가 실리면서 다시 크게 주목받았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유재하의 앨범이 '가창력 미달'로 금지곡이 된 적이 있다고 한답니다.

    2010년 10월 10일 1박 2일 방영분을 통해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방송되었답니다.

    2011년 MBC 우리들의 일밤의 나는 가수다의 5월 26일 방송분에서 박정현이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 를 불렀다. 나는 가수다 스포로 그녀가 이 노래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지만 잔잔하게 이 노래를 소화해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박정현은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선물받은 것이 유재하 1집이었고, 그 때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고 <나는 가수다> 방송 중의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2011년 6월 28일 KBS의 명작스캔들에 유재하편이 방송되었다.

    2012년 11월 2일 방송된 KBS의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는 <땡스 투 유재하> 특집을 방영하여 유재하와 관련있는 가수들을 초청해 유재하가 만든 노래 전곡을 TV 방송 최초로 공연했다. 이 방송에 출연한 이적의 말에 따르면 라디오 방송을 제외하고는 TV에서 유재하의 노래 전곡을 방영한 적이 없다고 한다.

    2013년 7월 20일 KBS의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서 유재하 특집을 방영하였다. 문명진이 '사랑하기 때문에'를, 조원선이 '우울한 편지'를, 홍경민이 '지난 날'을, JK김동욱이 '가리워진 길'을, 하동균이 '그대 내 품에'를, 원모어찬스가 '그대와 영원히'를 불렀다.

    2014년 10월 29일 라디오 스타에서 유재하를 주제로 한 유재하이기 때문에 특집을 방영했다. 일단은 토크쇼가 베이스다 보니 친구들(김광민, 장기호)이 들려주는 잡설(EX: 목소리가 맹구같았다.)들과 나머지 게스트 (조규찬, 박원)들이 들려주는 유재하에게 영향을 받은 점 + 바치는 노래까지 해서 재미와 감성을 둘 다 잡는데 성공했다.

    유재하 30주기를 기념하여 그를 소개하는 글이 올라왔다. 그의 음악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사랑하기 때문에 전 곡이 수록되어 있으니 읽어볼 만 하다

    2020년 유재하와 김현식의 인생을 다룬 너와 나의 계절이라는 영화가 제작 중이다. 송중기가 유재하 역할로 캐스팅 되었으나, 코로나로 인한 스케줄 조정 실패로 하차하였다. 이후 별다른 소식은 없다.

    2022년 기준으로 지금도 살아있었다면 환갑이랍니다

    = 추모 앨범 내용

    - 1997년 앨범
    1997년 유재하 10주기를 맞아 김현철의 프로듀싱으로 추모 앨범인 "유재하를 추모하는 앨범 1987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가 발매되었다. 음악 포털 등지에서 1997, 1987을 혼용하고 있는데 이는 1987의 8을 9와 8을 동시에 표현하는 문자로 디자인해 1997년에 1987년의 유재하를 추모한다는 의미의 앨범 타이틀이였다. '~그대를 위해' 등으로 기재된 곳도 있으나 이는 맞춤법에는 맞으나 원 앨범 제목과는 거리가 있다. 김현철이 전체 프로듀싱을 하고 그야말로 후덜덜한 라인업이 가창과 편곡으로 참여한 앨범이랍니다.

    

    김현철의 프로듀싱 치고는 과소평가받는 앨범이지만 추모 앨범에서 흔히 일어나기 마련인 '보컬/편곡 미스매칭' 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뿐더러 전체 프로듀싱을 한 명의 프로듀서가 담당함으로써 전체적인 완성도도 높다. 다른 추모 앨범들이 편곡에 힘을 쏟지 않았거나 음악적 역량이 떨어지는 일부 아이돌 내지 댄스 가수를 섭외하여 제작된 OME 트랙을 꼭 포함했던 걸 보면... 다만 음악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서정적인 스트링 편곡으로 가요계에 새 전기를 마련한 유재하의 추모 앨범임에도 당시 김현철의 음악 스타일이던 도회적인 브라스 위주 편곡으로 원곡과 정서가 많이 달라진 곡들이 좀 있어서(대표적으로 '지난 날'), 호불호는 좀 갈리는 편입니다.


    같은 해 발매된 신중현 헌정 앨범과 더불어 대한민국 대중음악 헌정앨범의 효시격인 앨범으로 꽤 괜찮은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수익금은 전액 유재하 기념 사업에 쓰였다고 한다.

    -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사후 유족들은 1집인 "사랑하기 때문에" 의 수익금을 이용해 유재하 음악 장학회를 세우고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재정 문제로 중단되었으나 2006년에 싸이월드의 후원으로 재개되었다. 2013년 역시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경연대회 개최가 힘들었으나, 100명에 가까운 이른바 '동문(역대 수상자들)'의 힘을 모아 겨우 개최가 가능하게 되었다. 근데 후원단체가 고정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힘들어질 상황이다. 2019년 30회 대회는 CJ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열렸다.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는 그동안 수많은 음악인들을 배출해냈다. 단순히 음악인이 아니라 한국 음악계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 

    유재하, 리메이크 뮤직비디오로 부활 '지난날 리버스'
    - 2018.10.31

    싱어송라이터 유재하(1962~1987)가 대표곡 '지난날'의 리메이크 뮤직비디오로 부활한다.

    지니뮤직에 따르면 올해 안에 출시되는 디지털 싱글 '지난날 리버스'에 맞춰 동명의 뮤직비디오도 선보인다. 최근 홀로그램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 유재하가 31년 전 함께 음악을 했던 선배 뮤지션 송홍섭(베이스), 정원영(키보드), 김종진(기타)과 그를 그리워하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 후배 뮤지션 스윗소로우(코러스), 이준(드럼)이 함께 노래 부르는 모습을 담는다.

    유재하가 몇 장 남기지 않은 사진과 드물었던 방송 출연을 참고해 지니뮤직과 KT가 홀로그램기술로 유재하의 얼굴 표정, 손동작, 몸짓을 컴퓨터그래픽으로 표현했다.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 후배가수 루빈이 유재하 대역으로 몸연기를 맡았답니다.

    '지난날'은 클래시컬 팝 앨범 1장으로 대중음악계에 한 획은 그은 유재하의 대표곡이다. 밴드 버전으로 태어날 '지난날 리버스'는 유재하의 목소리만을 추출하는 기술로 그의 맑은 음성을 되살려냈다. 스윗소로우의 화음이 포함되고 송홍섭, 정원영, 김종진 등의 연주가 더해진다.

    지니뮤직 안정일 비주얼컨텐츠사업팀장은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선후배 뮤지션은 모두 7명으로 전원이 홀로그램으로 살아 돌아온 유재하와 함께 공연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며 개런티를 받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등의 밴드에서 건반 주자로 활약한 유재하는 1987년 8월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한 뒤 11월1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올해가 31주기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데뷔 앨범이자 유작이다. 영향력과 가치를 사후에 인정받아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우울한 편지' '지난날' '가리워진 길' '사랑하기 때문에' 등 수록곡 대부분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고인을 기리고자 유재하음악경연대회도 열리고 있다. 갑작스런 사망으로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자 유족이 음원 수익금 등으로 장학회를 설립, 신인 싱어송라이터를 발굴하기 위한 대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됐다. 올해는 11월11일 소월아트홀에서 '제29회 CJ와 함께하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라는 제명으로 열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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