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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운계 이주일 나이 가족 사망,아들 부인 아내 제화자 고향 프로필
    카테고리 없음 2022. 9. 14. 20:35

    

    이종환 별세 '이주일부터 여운계까지' 폐암사망
    - 2013.05.30

    한국 DJ계 대부 이종환이 폐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향년 75세였습니다.

    서울 노원경찰서는 이종환이 30일 오전 서울 노원구 하계동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종환은 지난 2011년 폐암 진단을 받은 후 최근 서울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10일 전 퇴원해 자택에서 지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환이 사망한 가운데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연예인들에 새삼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코미디 황제 이주일은 2001년 11월 폐암 말기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오다 지난 2002년 8월 27일 사망했다. 고 이주일은 죽기 전까지 국민을 위해 금연 캠페인에 출연했으며, 당시 이 캠페인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약 300만 명이 금연을 시도했었다고 알려졌다.

    원로배우 여운계 역시 향년 69세의 일기로 폐암을 극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고 여운계는 지난 2007년 9월에 걸린 신장암으로 항암치료를 받았다. 이후 생긴 암세포가 폐로 전이돼 다시 폐암치료를 받던 고 여운계는 급성 폐렴으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돼 당시 출연 중이던 아침극 '장화, 홍련'(KBS2)에서 도중하차, 방송 관계자와 팬들을 안타깝게 했답니다.

    탤런트 이미경 역시 지난 2003년 10월 말 폐암선고를 받고 투병 중 6개월 만에 사망했다. 향년 43세. 고 이미경은 "마지막까지 암환자가 아닌 씩씩한 연기자로 남고 싶다. 행여 내가 아픈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말아 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박광정은 2008년 12월 15일 투병 중이던 서울대 병원에서 향년 46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고 박광정은 폐암진단을 받은 이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MBC 수목드라마 '누구세요'와 서울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연극 '서울노트'를 연출하는 등 세상을 떠나기 전 까기 연기 열정을 불태워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 이주일 프로필 이력 경력

    본명 이름은??
    정주일 (鄭周逸)
    출생 나이 생일
    1940년 10월 24일

    고향 출생지
    강원도 고성군 거진면
    사망
    2002년 8월 27일 (향년 61세)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마두동 국립암센터

    본관
    연일 정씨
    신체 키 몸무게
    170cm, 65kg, 260mm

    직업
    코미디언, 국회의원
    가족
    어머니 원춘옥, 배우자 제화자, 슬하 1남 2녀

    학력
    운양초등학교 (졸업)
    경포중학교 (졸업)
    춘천고등학교 (졸업)
    경원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 수료)
    종교
    불교

    대한민국의 희극인. 본명은 정주일. 코미디계의 전설로 남은 인물이다.

    

    코미디의 황제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코미디언이자 1980년대 한국 방송계의 아이콘이다. 정치권에서 그 이름값 하나만으로 서로 먼저 모셔가려고 다툰 유일한 연예인이다. 참고로 1980~1990년대 당시 아무리 인기많은 연예인이라도 실상 무식한 광대, 딴따라 취급을 받던 것이 현실이었는데 지금보다 더 콧대높고 권위적이었던 정재계 엘리트들이 먼저 주목을 하고 캐스팅을 서로 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 그의 위상을 말해준답니다.


    대머리 때문에 전두환을 닮은 것과 외모적으로 저질 연예인이라 낙인 찍혀 1980년 3월부터 1981년 1월까지 방송정지 징계를 받은 사연으로 유명한데, 방송정지가 풀린 사연도 특이하다. 막상 전두환은 이주일의 개그를 즐겨봤던지라 이주일이 방송에 나오지 않자 어리둥절했고 사정을 알고나서는 윗분의 취미를 모르는 아부성 충성으로 이주일에게 방송정지 징계를 먹인 아랫사람들을 크게 문책한 뒤 여러 번 자택으로 불러 술자리 독대를 가졌다고 한다. 이 이후로는 이주일과 전두환의 관계는 오히려 친밀하게 보일 정도였는데, 이는 중간에 다리 역할을 했던 박종환 감독의 인연 덕분도 있다. 박종환은 이주일과 춘천고등학교 동창이었고 전두환은 소문난 축빠였기에 박종환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빈다.

    또한, 당시 재계 서열 1위 현대그룹의 왕회장 정주영도 개인적으로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분을 맺고 후에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정치권에 나설 때 이주일을 먼저 영입할 정도였다. 대통령과 재계 서열 1위 회장이 먼저 찾아오게 만들 정도의 유명세와 네임밸류를 가진 한국 연예인은 이주일 이전, 이후에도 없답니다.

    = 전성기 시절은???

    당시를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 연예인 한 명이 이 정도 규모로 하나의 사회현상을 일으킨 인물은 대한민국 역사상 이주일이 유일하다. 이름이 유래된 그대로 '2주일'(이주일)만에 신드롬급으로 떠서 업계 1등 국민스타가 된 유일한 연예인이다. 심지어 조용필조차 당시 연예인으로서 가졌던 위상과 인기, 하나의 사회현상의 크기로 따진다면 이주일의 상대가 못된답니다.

    훗날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요계에 폭풍을 일으키지만 충격의 여파는 가요계 흐름변화에 그쳤고 연령대 역시 사회 장년층과 노인층에게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대한 충격의 크기로는 역시 이주일 신드롬에 비해 다소 약한 편이라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당시 이주일은 그야말로 이제 말을 이해하기 시작한 어린 아이부터 80대 노인까지 TV를 보는 한국 사람 전부에게 충격으로 다가왔고 TV를 지배했답니다.

    단 한 명의 연예인이 사회 전체에 이 정도 파장을 남긴 일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당시 지상파의 위상을 알려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1980년대 지상파 방송의 위상은 경제적으로 조금씩 사정이 나아지면서 여가를 즐기기 시작한 대중들이 컬러TV 시대가 시작됨과 동시에 이전 시대보다 더욱 방송매체에 몰려들기 시작한 시점이다. 라디오의 시대는 완전히 저물고 케이블 방송이나 인터넷 매체는 출현하기도 이전이다 보니 지상파 방송이 대중매체의 모든 걸 독점하던 것과 다를 바 없던 셈이랍니다.

    그런 시대에 압도적인 업계 원톱의 위상을 가졌던 이주일은 한 마디로 '현 시대의 유재석급 국민MC + 젊은 층에게 어필되는 케이블 방송 예능인과 유명한 인터넷 방송인들'을 모조리 종합한 위상 및 파급력 혹은 그 이상이었다고 봐도 좋은 셈이다. 사실상 조용필과 더불어 딴따라 광대 취급받던 연예인이 정재계 인물급으로 존경받는 유명셀럽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포문을 연 인물이라 볼 수 있답니다.

    어려웠던 1980년대, 국민들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전설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으며 사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그런데 그 이유인즉, 코미디언으로서의 업적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금연운동에 기여한 공로였다. 어쨌건 이주일의 메시지는 역대 금연 광고 중에서도 가장 높은 효과를 냈다고 한답니다.

    = 캐릭터에 대해서 설명

    이주일식 코미디의 백미는 문장들을 더듬거리며 말하다가, (시청자의 예상을 뒤엎는 타이밍에) 실없는 소리를 툭하고 던져서 의표를 찌르는 것이다. 이용식과의 콤비 개그나 이 장면을 보면 잘 나타난다. 특히 얘기를 시작하면 그 주제에 집중해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은 제대로 하는데 이것저것 두서없이 주워섬기다가 나중에는 얘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방식을 많이 썼다. 지금 스타일로 비교하면 당시 시대감안을 해서 약간 템포가 느긋한 의식의 흐름 기법이나 아무말 대잔치 스타일의 스탠드업 코미디나 만담이 주요 스킬이었다. 중간에 분위기가 지루해질 틈이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수지큐 음악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거나 슬랩스틱 콩트, 못생긴 얼굴컨셉 개그를 선보인 것 역시 이주일 개그의 백미 중 하나랍니다.

    

    '이주일'이라는 본인 그 자체 역시 주무기였는데 수많은 후배 코미디언들이 개인기로 선보인 특유의 어리버리한 말투와 독특한 허스키 보이스는 물론이고 눈이 풀린듯한 바보스러운 표정과 흐물거리는 듯한 몸짓 등 이런 점들이 당시 대중들에게 있어선 이주일이라는 인물이 하나의 캐릭터로서 받아들여진 큰 흥행요소였다. 이런 자체적인 캐릭터성이 심형래를 비롯한 일반적인 콩트 시대 코미디언들과 확실히 다른 부분이었다. 심형래는 뛰어난 바보연기를 통해 '영구', '펭귄', '바보 권투선수'등등 가상 캐릭터를 만들어서 웃겼던 콩트 원툴에 가까운 코미디언이었다면 이주일은 가상 캐릭터가 아닌 이주일이란 사람 자체의 본연적인 말투, 몸짓, 표정이 워낙 특이해서 어떤 코미디 무대에서든 먹히는 케이스였답니다.


    즉, 심형래를 비롯한 당시의 코미디언들은 컨셉을 잡고 가상의 인물을 연기해야 웃겼는데 이주일은 등장만으로 웃긴 셈이다. 실제로 이주일은 악극단 출신 구세대 코미디언들이 '웃으면 복이와요'나 '고전 유모어극장' 등에서 주로 대본에 따른 꽁트 코미디를 했던 1960-70년대에는 자기 자리를 잡지 못했었다. 4차원적 유머를 구사하는 스탠드업 코미디 솔리스트라는, 시대를 앞서간 감각을 가진 사람이어서 젊어서는 잘 쓰이지 못하다가 4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새로운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대스타가 된 케이스 였습니다.

    욱하는 성격을 자체적인 캐릭터로 컨셉잡아 호통치는 아저씨로 어필한 이경규, 박명수나 어리버리하면서 친근한 소시민적인 성격으로 어필한 김국진 등이 종류는 다르지만 이주일과 비슷한 내추럴한 접근법으로 인기를 끌은 후배 코미디언들이라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콩트 시절보다 현재의 예능 트렌드인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더 먹힐 법하다. 사람 자체가 특이해서 웃긴 캐릭터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최불암과 동갑이다. 둘 다 1940년생. 또한, 이소룡과 척 노리스 역시 이 두 사람과 같은 나이인 1940년생이다.

    - 데뷔와 아울러서, 악단 사회자 시절

    1940년 10월 24일, 강원도 고성군에서 도청 공무원이던 정명수의 1남 1녀 중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여느 아이들보다 좀 큰 몸집에 사고뭉치 기질을 지닌 탓에 싸움이 자주 터져 부모가 대신 치료비를 내줘야 했고, 그의 내려앉은 콧날과 얼룩덜룩한 흉터가 그 당시 싸움으로 생긴 것이다. 운양초등학교 졸업 후 아버지가 속초에서 강릉으로 전보되면서 강릉사범학교 병설중학교(현 경포중학교)를 다녔다가, 강릉으로 이사간 후 춘천고등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나중에 경원대학교(現 가천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답니다.

    강릉사범 병설중 때부터 축구에 흥미를 느껴 춘천고 재학 시절에는 축구부의 라이트윙으로서 제24회 전국체육대회 때 강원도 대표로 출전하여 준우승까지 거둘 정도로 제법 활약을 보였고, 친구 박종환과 함께 신흥대학교 축구부로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이주일은 고향에서 보내 준 대학 등록금을 섯다판에서 모두 털리는 사고를 쳤고, 도피처로 군 입대를 선택했답니다

    1960년 육군 입대 후 위생병 병과에 속하다가 문선대(현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에 뽑히면서 장병위문 쇼의 사회자를 맡았고, 1964년 제대 후 1965년 이종건이 이끄는 샛별악극단의 연구생으로 입단하여 코미디언 인생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월급 없이 먹이고 재워준다는 조건으로 1년 동안 묵다가 배삼룡, 양훈, 양석천 등이 모인 '오향쇼'에 들어가 견습생 생활을 거쳐 1967년부터 여러 쇼 단체들을 돌며 사회자 생활을 했답니다.

    서울신문사의 주간 방송잡지 <TV가이드> 1982년 11월 20일자 '스타연구'에 따르면 그가 연예계로 진출한 계기는 본인이 태어난 지 100일 될 때 아버지가 도사에게 쌀 15섬을 주고 아들의 미래를 물어서 답한 사주팔자가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대략 "초년엔 팔자에 없는 의술에 종사하고 화류계에 몸을 던져 떠돌아다녀야 제 명을 다한다. 40대 중반에 전성기를 맞고 47~50세에 여자 때문에 패가망신을 당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이주일 자신은 코미디언으로 뜬 뒤에도 그 사주를 적은 붓글씨를 본인 집에 가보 1호로 신주단지 모시듯 귀중히 했답니다.

    극장쇼 사회자가 된 뒤에도 찻값이 없어 동네 다방, 구두닦이 앞을 기웃거리다가 지방쇼 다니는 쇼 단장을 어쩌다 만나야 생길 정도로 일거리가 안 잡혔고, 철제 캐비닛을 만드는 공장장으로 전직해 2년 여를 버티다가 1971년경에 동료였던 방일수, 김정남 등의 권유로 베트남 파병 병사들을 위한 위문공연 길에 지원하여 조금 이름을 알린 것을 제외하면 외모 때문에 일거리가 여전히 안 잡혀 10년도 넘게 무명 코미디언의 설움을 겪으면서 상당히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콩나물 팍팍 무쳤냐"라는 그의 유행어는 당시 집이 매우 가난해서 먹을 반찬이 직접 키운 콩나물뿐이었던 에피소드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이주일은 최고 인기가수로 주가를 올리고 있던 하춘화를 월남 위문 공연때 만난 인연으로 1974년부터 하춘화의 국내 공연때 보조 MC로 기용되게 된다. 처음에는 너무 못생겼다는 이유로 기획사로부터 퇴짜를 당하는 등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이주일은 하춘화 공연의 전속 사회자로 발돋움하여 대중들에게 차츰 인지도를 얻게 된답니다. 1977년 11월 11일, 이리 시내의 극장에서 가수 하춘화의 리사이틀 MC를 맡고 있던 이주일은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하자 폭발로 인해 무너진 극장 천장에서 떨어진 벽돌을 정통으로 맞아 머리를 심하게 다치는 중상을 입고도 일어나서 하춘화에게 "내 머리를 디디고 내려오라!"고 외치면서 구해준다.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하춘화를 업고 전력 질주로 사고 현장에서 벗어나 병원으로 달려갔답니다.

    이주일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하춘화는 다행히 찰과상 정도로 그쳤지만 정작 이주일 본인은 후두골이 함몰된 후유증으로 수 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져야만 했다. 이후 하춘화는 항상 자신이 공연하는 쇼의 사회자는 "이주일 씨가 아니면 안된다!"라고 공연 관계자들에게 강력히 공언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주일은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씨 덕분에 우리집을 샀다"라면서 한참 여동생 뻘의 연하인 하춘화를 자신의 은인으로 존경했고 둘은 10여년 동안 무려 5천여 회의 공연을 함께 했답니다

    - 티비 진출과 전성기의 시작은 언제?

    1979년 하춘화가 결혼으로 인하여 연예계를 떠나게 되면서 이주일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런 그를 위해 하춘화는 MBC에 이주일을 추천하였고 이주일은 당시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이던 웃으면 복이와요에 출연하면서 처음으로 TV 무대에 데뷔하게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한국 나이로 40세였으니 코미디의 황제라는 명성에 비하면 굉장히 늦깎이로 방송에 데뷔한 셈이다. 참고로 당시 방송에 출연하던 코미디언 중 유일하게 서영춘만이 이주일을 처음 보고 속으로 '저 친구 TV에 나오면 반드시 뜬다!!'라면서 이주일의 재능을 간파했다고 한답니다.

    하지만, 기존에 출연 중이던 선배 코미디언들의 견제와 "뭐 저렇게 못생긴 놈을 내보내느냐?"는 시청자들의 불같은 항의로 인하여 이주일은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단 1회 출연만에 강제 하차 당했다. 그래서 나중에 "얼굴이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이주일의 유행어가 된다. 이후로도 ~~해서 죄송합니다 등의 바리에이션으로 리그베다 위키나 나무위키 등지에서 많이 쓰이는데, 원류는 바로 이주일인 셈이랍니다.


    다행히도 연예계 선배인 송해의 주선으로 이주일은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 김경태 PD에게 발탁되어 TBC의 코미디 프로그램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 캐스팅되었다. 첫 방송에서 이주일이 맡은 역할은 당시 청춘스타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가수 윤수일이 타잔 흉내를 내면서 줄을 타고 공개홀 한가운데 만든 연못을 가로지르는 콩트의 단역(정확히는 인디언)이었답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무 긴장했던 이주일은 조연출의 큐 사인을 무대로 올라오라는 지시로 착각하여 바로 무대 중앙으로 올라가 버렸고, 결국 줄을 타고 내려오던 윤수일과 부딪혀서 연못 속에 빠져버렸다. 한술 더 떠 당황한 이주일은 연못에 빠진 상태에서 그대로 얼굴을 들어 멍한 표정으로 카메라와 눈을 마주쳤는데 그 모습은 가히 물에 빠진 ET 꼴이었다. 그것도 생방송에서 말이다. 이 날 방청객과 시청자들은 "저놈 뭐하는 거냐?"면서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1996년 방영된 이주일의 투나잇 쇼 3화에서 다시 한번 언급된 적이 있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당연히 두 번 다시 TV 무대에 얼씬도 못할 수준의 초대형 방송 사고였지만 이때 빵 터진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재차 출연하게 된다. 이 때 맡은 배역은 의사였는데, 환자 역할을 맡은 코미디언 최용순의 눈을 까뒤집어 보고는 "운명하셨습니다"라고 한마디 할 뿐인 단역이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병실에 뛰어들어 오자마자 운명하셨습니다! 라고 외쳤고 이에 조연출 PD가 '환자 눈이라도 까뒤집고 대사를 쳐야 할 거 아니냐?' 라는 신호로 눈을 까뒤집는 시늉을 보이자 이주일은 그만 자기 눈을 까뒤집어 보이며 운명하셨습니다!를 읊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생방송에서... 이 애드립 아닌 애드립에 방청객들은 물론 출연자와 방송 스탭까지 모두 그 자리에서 배를 잡고 뒹굴어야 했답니다.

    단 2번의 방송 출연에서 이처럼 엄청난 임팩트를 선사한 코미디언의 이름이 궁금해진 시청자들은 TBC에다 문의 전화를 계속해서 걸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반응을 본, 아직 정주일이라는 본명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는 딱 2주일만에 떴다는 뜻에서 이주일로 예명을 정하게 된다.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는 프로그램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에는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 서영춘을 비롯 기라성 같은 유명 코미디언들이 출연하고 있었는데, 이후 대부분의 코너가 이주일을 전면에 내세우는 코너로 바뀌게 된다. 이때 탄생한 유행어가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이외에도 이상해와 콤비를 결성하여 판토마임[32]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수지 큐(Susie Q)[33]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독특한 춤은 이주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답니다.

    이 춤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이주일 추모 다큐멘터리에서 한 초등학교 교장의 증언에 따르면 "애국조회 마치고 '교실로 갓!'이라는 구령이 나오면 천 명에 가까운 전교생이 동시에 수지 큐 춤을 추면서 교실로 들어갔다니까"라는 반응까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일부 교사들과 학부모들은 이주일을 굉장히 싫어했다. 이유는 "멀쩡한 애들 다 버려놓는다"여서였다. 물론 학부모들이나 교사들의 이유가 타당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것이 이 당시만 해도 '보고 흉내내는 그대로 된다'고 믿던 때였다. 그러자 이주일은 "내 프로그램을 보고 바보가 된 아이들은 나에게로 보내달라, 내가 1주일 안에 정상으로 돌려놓겠다"라고 어이없어 했었답니다.

    여담으로 심형래도 학부모들에게 이런 비슷한 항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학부모가 "애가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 살펴볼려고 방문을 열고 봤더니 거울 앞에 서서 "띠리리리리리~ 소쩍꿍, 소쩍꿍" 하면서 춤추고 있더라" 라면서 심형래를 질책하는 말을 했었다. 그러자 심형래는 크게 불쾌해하면서 "그 애가 중학생이 되도록 그러고 있으면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지?"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개그맨 '옥동자' 정종철도 역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고 한다. 개그콘서트 시절 당시 갈갈이 삼형제에서 초등학교의 조회 흉내를 냈다가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사연인 즉 조회의 교장선생님 훈시 때가 되면 사방 여기저기에서 '킥킥'대는 바람에 난처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학생들만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선생들까지 이 'ㅋㅋ' 행렬에 동참(?)하는 통에 권위가 안 서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코너에서 나왔던 온곡초등학교는 실제로 정종철의 모교였답니다

    - 방송출연 중단과 복귀 알아보기!

    이처럼 전성기가 막 시작된 시절부터 너무 못생겼고, 저질이란 시청자들의 어처구니없는 항의를 계속해서 받았던 이주일은 결국 1980년 연예인 사회정화운동에 따라 해당 사유로 8월 29일에 열린 5개 TV/라디오 방송사 심의실장 회의에서 9월 1일부로 이기동, 배삼룡, 태진아, 나훈아, 심수봉 등 24명의 연예인들[37] 과 함께 출연금지 연예인으로 지정되어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고, 1981년 신정에 출연금지가 해제되었다. 이주일이 방송에서 퇴출되기 직전에는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그 영화에서는 바지사장으로 사기당하는 시골 총각으로 등장한다. 

    이후 KBS1 <100분 쇼> 등을 통해 방송에 복귀 한 이주일은 "여러분! 제가 얼핏 보면 못생겼지만 자세히 뜯어보시면... 더 못생겼습니다", "따지냐~?", "콩나물 팍팍 무쳤냐?" 등의 유행어를 히트시키면서 80년대 대한민국 코미디계의 황제로 군림하게 된다.

    이주일은 1980년도부터 1986년까지 7여년 이상 연예인 수입랭킹 1, 2위를 도맡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답니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 MBC에 전속출연하기로 계약을 맺을 때 전속금 1억[39][40]을 받았고 1980년대 연예인 납세 1, 2위를 다툴 정도. 쉽게 말하자면 '1980년대를 풍미한 트로이카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급이나 가왕 조용필 정도는 되어야 이주일이 돈 버는 정도로 엇비슷하게 벌었으며 그마저도 버금갈 정도이지 전부 이주일이 벌어들인 수입에는 못미쳤다. 오죽하면 소속사에서 보너스로 당시 최고급 수입차였던 토요타 크라운 을 이주일에게 선물했을 정도.# 이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서 이주일은 농심 전속모델로서 1982년부터 1984년에 강부자에게 승계하기까지 라면 CF에 많이 출연하였다. 라면 CF를 찍은 이유는 이주일 본인이 라면을 좋아해서였다고 한다.

    복귀 이후 절정의 인기를 얻은 이주일은 1980년대 중반부터는 TV보다 극장식당 <무랑루즈>, <초원의 집>[42] 등의 밤무대 에서 많이 활동했는데, 지금보다 밤무대가 훨씬 비중도 크고 돈도 많이 벌던 시절이라 그의 코미디계 원톱 지존 자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밤무대의 제왕이었다. 이 때의 유행한 유행어가 "일단 한번 와보시래니깐요~!"

    당시 밤무대에서 활동하던 이주일의 개그를 직접 목격한 어르신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주일의 진짜 지존 개그는 방송에서 보여주는 그런 건전개그가 아니라 밤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EDPS(...)." 약한 예를 들자면, 수캐가 소변을 볼 때 한 쪽 발을 드는 이유는?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

    이주일이 방송출연을 금지 당했던 것은 전두환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당대에는 프로그램 제목이 외래어 단속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방송시간이 당국에 의해 정해질 정도로 방송에 대한 통제가 매우 강했던 시절이었고,[44] 서울의 봄이 끝내 좌절되고, 전두환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나서는 사회분위기가 다시 박정희때의 그 것으로 돌아오면서 방송사 관계자들이나 심의를 당담하던 사람들도 자연히 전두환의 눈치를 보는것이 당연했다. 그 당시 이주일 외에도 대머리였던 연예인들이 방송에 거의 나오질 못했다. 덧붙이자면 그 사람을 닮은 배우 박용식은 그 사람을 닮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한동안 방송을 쉬어야만 했고, 방앗간을 운영하며 참기름을 팔아 근근히 생활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건 이후 MBC의 정치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그 사람의 연기를 맡게 된다는 것이랍니다.

    -전두환과의 관계, 그리고 축구광!

    이주일 본인이 한국일보 <나의 이력서> 연재 당시 자신이 전두환을 풍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자신은 전두환을 경애하며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전두환과 이주일이 축구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일은 춘천고 시절 축구선수로 뛰었으며, 춘천고 동창생이 바로 1983년 멕시코 U-20 월드컵 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룬 빠따 박종환 감독이다. 전두환 역시 대구 공고와 육사 생도 시절에 축구부 골키퍼를 하였다.

    이주일이 무명시절에 고생을 할 때, 박종환이 가끔씩 도와줬다고 하는데 이주일의 부인이 출산 후 몸조리는커녕 먹을 게 없어서 고생하고 있을 때 박종환이 미역과 쌀을 사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주일은 항상 박종환을 고맙게 생각했고, 유명 코미디언이 된 이후에는 박종환 감독에게 승용차를 선물하기도 했다고 토크쇼에서 여러번 언급하였다. 본인도 고인이 된 이주일을 언급하면서 "그 친구만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며 각별한 우정을 과시했답니다.

    이주일은 박종환 감독과 인연으로 전두환과 만났고, 이후로도 줄곧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 사실 방송출연 금지 크리를 맞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당시로서는 방송출연보다 벌이가 좋은 밤무대에 전념할 수 있었고, 생계에 지장은커녕 방송에서 얻은 지명도와 방송에서는 볼 수 없다는 희소성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경제적으로는 윤택해진 데다가 방송출연금지조치도 얼마 안가 해제되었기 때문에[45] 전두환의 조치에 불만을 크게 가질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예능 프로에서 개그맨 최병서가 실화를 소개했는데, 이주일이 사기를 당해서 충격을 받고 포장마차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옆에 위로차 같이 있던 자신에게 뜬금없이 "전두환 전대통령한테 나의 억울함을 호소해야겠다."며 전두환 전대통령 집을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최병서가 거기 몇번 가봤던터라 안다고 했더니 오밤중에 최병서가 모는 차를 타고 전두환의 집에 불쑥 찾아갔다고 한다. 대문벨을 누르자 전두환이 대문까지 나와서 "아이고, 이게 누구야!"라고 말하며 반갑게 맞이하며 술상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왔다고 한다. 여담으로 전두환과 이주일 앞에는 고기반찬이 최병서 앞에는 묵반찬이 있었는데 고기를 먹고 싶었지만 손을 뻗기가 눈치보여서 앞에 있는 묵만 묵묵히 먹었다고 한다. 이를 본 전두환은 최병서가 묵을 굉장히 좋아하는 줄 알고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묵을 더 갖다달라고 얘기했답니다.

    그밖에 잔디구장 건립기금으로 1천만 원을 내기도 했고, 연예인 축구단인 무궁화 축구단 단장을 지낸 바 있으며, 상기했듯 2002년 월드컵 당시 투병 중인 몸을 이끌고 직접 경기를 관전하였다

    - 서영춘과의 관계

    구봉서와 이주일은 상당히 어려운 관계였지만 역으로 당시 구봉서와 트로이카를 이뤘던 서영춘과는 또 사이가 아주 좋았고 막역한 형-동생 사이였다.

    둘의 나이 역시도 12살이라는 띠동갑의 관계였지만, 서영춘은 이주일이 코미디언으로 진출할 수 있게 밀어준 선배이고 특히 이주일의 회고록을 보면 서영춘에 대한 존경심이 절절히 묻어나는데,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보면, 서영춘 선배는 살살이라는 체격과 이미지와 다르게 누구보다 호탕하고 리더십이 넘치는 분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거기에 이주일이 1970년대 초반 처음 코미디언으로 데뷔하고 서영춘을 따라 지방 순회 공연을 다녔는데, 그때마다 서영춘이 후배들은 물론이고 악단원과 스태프들을 모두 모아 배에 기름기가 낄 정도로 술과 고기를 쏘는 회식을 자비로 치뤄줬다고 한다.


    다만, 한 가지 깨는 일화도 있는데, 코미디언들을 데리고 부산에서 회식을 치뤘을때 서영춘이 완월동의 아가씨들을 불러와서 이주일과 다른 코미디언들에게 짝을 맞춰주고 알아서 잘 모셔라. 이 나라에서 코미디 일인자들이다.라고 여자를 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1970년대 이야기라지만, 지금이었다면 난리가 날 상황이었을 것이랍니다.

    - 조용필, 이덕화, 최병서와의 관계

    이주일은 이덕화, 조용필, 최병서와는 분야와 나이를 모두 초월한 절친이었다.[50] 특히 조용필과는 둘도 없는 술친구였다고 한다. 두 사람 다 주량이 가공할만한지라 주사도 끝내줬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이외에도 최병서가 이주일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이덕화와 조용필을 전화통화로 낚거나, 심지어는 이주일의 사인을 똑같이 흉내내어(!) 술값을 결제한 에피소드 등이 유명한데 이덕화나 최병서가 방송에 출연하면 꼭 등장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랍니다.

    이들은 이처럼 친했었고, 1952년생인 이덕화는 12살이나 아래였지만 서로 의형제처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1996년 이덕화가 당시 신한국당 광명시 갑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였을 때 국회의원 시절을 생각하며 이덕화에게 "정치 하지 마라, 내가 그 판에 몸소 경험해 봐서 아는데 그거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근데 왜 너는 그 판에 가려고 출마를 하느냐, 차라리 출마하지 말아라."라며 충고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덕화는 이런 이주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한국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였고 결국 낙선하게 되면서 이주일과 마찬가지로 배우로 방송계에 돌아오게 되었다. 1997년에는 북한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아들인 이한영이 피살되자 북한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껴서 한때 이덕화의 자택에 은신한 적도 있다고 한다.[52] 이덕화는 이주일이 죽기 직전에 시한부 인생인 이주일에게 가발을 맞춰주기까지 했답니다.

    최병서와는 전두환 집에 찾아간 일화 이외에도 여러 일화가 있다. 한번은 미국에서 후배들과 순회공연이 끝나고 기념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던 중 사진기가 없어서 근처 상점에 들렸을때 이주일이 최병서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야, 카메라가 영어로 뭐냐?" 그러자 최병서는 "알면서 그렇게 캐므러?"라고 답했다고 한다.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1988년 4월 MBC의 한 코미디 프로에 나와서 "이제 13대 국회가 시작됐습니다. 13대 국회도 횡설수설을 즐겨하는 국회가 된다면 이 이주일도 14대 총선에 자신있게 출마하겠..."라는 개그를 시전한 바 있는데 4년 뒤인 1992년 스스로 뱉은 개그가 현실이 됐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으로 진출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통일국민당을 결성하였을 때 처음에는 참가할 듯하다가 마음이 심란해져서 홍콩을 다녀온 이후 국회의원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러자 정주영 회장은 노구를 이끌고 그 날 이주일이 게스트로 출연한 SBS 본사 앞[54]에 가서 10시간을 기다렸다. 이주일이 기자들을 피하기 위해 방송이 끝나자마자 홀연히 뒷문으로 빠져나간 뒤인지라 정주영 회장은 헛걸음한 셈이 되었지만, 국민들에게 '정주영은 아직 늙지 않았다'는 믿음을 퍼뜨린 사건이었다. 결국 이주일은 왕회장의 노력을 차마 못 본 체 할 수 없는지라 출마를 결정했다. 지역구는 살림이 어렵던 시절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친구 집에 5년 동안 얹혀 살았던 인연이 있어서 구리시를 택했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답니다

    그러나 통일국민당은 '당원이 1,000만인데 득표수가 400만에 못 미치는' 기현상[55]과 함께 푸시식 가라앉았고, 도중에 민주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긴 이주일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정치판과의 인연을 끊었다. 이 당시 연예계에 복귀하면서 "여기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떠난다"라고 남긴 말은 전설로 남았습니다.

    이주일은 후일 정치인 시기를 회고하면서 역시 여당이 좋더라라는 말을 남겼다. 정주영 정계은퇴 후 본인도 국민당을 탈당하고 정치에 의욕을 잃어가면서 지역구인 구리에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게 없다고 생각하여 미안해했는데 마침 안정의석 확보에 나서던 집권여당 민주자유당이 입당을 제의하자 (어차피 정치에 뜻을 잃어 다음 선거 불출마할거니 지르고 보잔 식으로) 구리에 실내체육관 하나랑 구리여고에 강당 좀 지어주소라고 조건을 내걸었더니 바로 조건을 콜했고, 예산이 반영되어 체육관과 강당이 지어졌다고 한다. 애초에 이주일은 구리에 체육관을 짓는 것과 구리여고에 강당을 짓는 것은 '이러면 공천을 안하겠지'라는 생각에 요구한 건데 들어줘서 놀랐다고 한답니다.

    또한, 이주일은 국회의원 세비도 반납하는 등 차별화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시대를 앞선 세비 반납과 연예인 출신이라는 점 등으로 동료 의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국회 국정활동이 생방송으로 중계되었을 때 이주일이 질의를 하는 모습을 보고 동료의윈들이 킥킥 웃는 장면이 방송에 나갈 정도였으니... 실제로 이주일은 국회의원이던 당시 상당히 진지하게 국정활동을 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딴따라 따위가 뭘 안다고 정치냐?"란 말을 들을까봐 열정적으로 임했다고 한다.

    1996년, SBS에서 방영을 시작한 이주일의 투나잇 쇼로 다시 연예인으로 돌아온 이주일은 복귀 뒤에는 꽤 수위 높고 풍자성 강한 개그를 선보였다. 너무나 강렬해서 방송위원회에서 경고를 수차례 받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흑역사도 있었다

    - 여담들

    90년대까지만 해도 코미디언들의 세대 구분법은 이주일과 코미디를 해 본 사람과 안 해 본 사람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2010년대 기준으로 희극계에서 고참급이라고 불리는 이들 중에서 이주일과 같이 코미디를 해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이제는 공개 코미디의 큰형님격 인물들이 된 SBS 5기 코미디언들인 심현섭, 김준호, 강성범도 까마득한 신인 시절 때나 이주일이 진행하던 코미디 쇼에 출연했다. 이때 심현섭은 이주일이 MC 역할인 코너에 출연해서 옆에서 이주일이 설명하는 표정이나 행동을 재현해주는 역할을 맡았답니다

    못생긴 외모로 괄시아닌 괄시를 받던 이주일에게도 외모로 이긴 상대가 있었으니 바로 가수 조영남이었다. 한 번은 그가 야간업소(당시엔 가족들이 같이 외식하면서 유명 연예인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극장식당이 성행했다.)에 출연했는데, 조영남도 같이 출연했다. 그런데 관객들 중 어린이 한명이 조영남을 보곤 울음을 터뜨렸는데 이유인즉 험상궂은 조영남의 외모 때문이었던 것이랍니다.

    연예계에서도 손꼽히는 축빠였지만, 프로야구단 홍보대사 역할을 한 적도 있다. 청보식품 모델 시절이던 1985년 청보 핀토스의 홍보대사 겸 일일 응원단장으로 나섰다. 당시 이주일이 청보식품의 모델이기도 했고 청보 핀토스의 연고지가 이주일이 학창시절을 보낸 강원도라는 점도 영향이 있었다.[64] 창단식 때는 유니폼을 차려입고 사인볼을 주고 파도타기 응원을 주도했다는 기록도 있답니다.

    또 다른 개그맨들 중에서는 이주일의 절친한 친구이자 원조 인간복사기로 유명한 후배 최병서도 대단히 흉내를 잘낸다. 이주일, 이덕화, 조용필과 같이 술을 먹다가 최병서가 각자의 집에 다른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나 오늘 늦는다~"라고 하면 부인들이 전부 속았다고. 이 외에도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야인시대의 신불출로 등장했던 중견 개그맨 김종국 역시 이주일의 성대모사를 많이 해서 잘 알려지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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