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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국회의원 프로필 고향 지역구 남편 이승배 나이 학력 아들카테고리 없음 2023. 7. 28. 01:42
철의 여인' 심상정 정의당 신임 당대표
- 2019. 7. 13.
13일 정의당 신임 당대표에 선출된 심상정 의원은 노동운동의 상징이자, 진보진영의 '대모'로 불리는 3선 의원이다.
1959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심 신임 대표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서울대 최초의 총여학생회를 만들었답니다.
1980년 당시 미싱사 자격증을 따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해 노조 운동에 나섰던 유명한 일화도 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 사건의 주동자로 9년간 지명수배생활을 했고, 당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심 대표는 최초의 산업별 노동조합인 전국금속노동조합의 사무처장으로도 일했습니다.
2005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17대 국회에 입성했고 2007년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경선에 출마했으나 권영길 후보에 패했다.
2008년 진보신당을 창당해 대표를 맡았고 3년 여뒤 통합진보당을 창당했으나 비례대표 부정경선 파문에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故) 노회찬 의원과 통합진보당을 탈당한 후 정의당을 창당했다. 20대 총선에서는 경기 고양시갑 에 출마해 당선됐답니다.
최근까지 선거법 개정을 논의하는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으나 위원장 교체 과정에서 여당 등과 마찰을 빚었다. 심 대표는 여야 교착국면에서 당의 존재감을 높이는 동시에 내년 총선을 이끌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답니다.
Δ경기 파주 Δ명지여고 Δ서울대 역사교육과
심상정 남편 이승배, 그의 가사노동 자부심은 강하다
- 2022. 2. 26
아내와 남편의 꿈은 같다. 역할만 서로 다를 뿐이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63)와 배우자 이승배씨(66)는 진보정당이 시민의 삶에 확고히 뿌리내린 사회를 꿈꾼다. 심 후보가 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게 이씨의 역할이다. 이씨는 가사노동을 도맡고 있다. 지난 2월 23일 경기 고양 심 후보의 지역구 사무실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이씨는 “제 자아실현의 방법은 아내의 일을 적극 돕는 것”이라며 “심 후보는 국민을 올바른 길로 안내하는 길잡이이고, 나는 그의 조력자”라고 말했습니다.
유독 ‘배우자 리스크’가 부각되는 선거가 펼쳐지고 있다. 그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길동무’처럼 이씨는 심 후보의 유세현장에 동행한다. “내가 ‘대통령의 배우자’가 되는 것보다 심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했다. 둘은 어떻게 만났을까. 이씨는 심 후보를 “우주의 인연으로 만난 영원한 동반자”라고 표현했다.
■심상정은 정치만 하시라
이씨와 심 후보는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하다가 인연을 맺었다. 이씨는 심 후보가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했을 때 뉴스를 통해 심 후보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구로동맹파업은 단일 사업장을 넘어 최초로 여러 노동조합이 연대한 파업이었다. 이씨는 당시 화물 분야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동양사학과에 입학해 1983년 졸업했답니다.
둘은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활동을 통해 처음 만났다. 심 후보는 1985년 8월 노동자 정치조직인 서노련 결성을 주도했고 중앙위원장을 맡았다. 1986년 가을쯤 이씨가 서노련 관련 모임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심 후보가 등장했다. 심 후보는 당시 수배 중이었다. ‘김혜란’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심 후보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에서, 이씨는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에서 활동하며 가까워졌다. 1992년 결혼에 이르렀다.
이씨는 결혼 후 출판사를 운영했다. 심 후보가 노동운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던 터라 생계 방편이 필요했다. 이씨는 “처음에는 출판사를 전심전력으로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느 시점이 되면 노동운동 일선으로 돌아가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고 말했답니다.
심 후보는 2003년 인생의 갈림길에 섰다. 최초의 산별노조인 전국금속노조 사무처장 임기를 마쳤을 때다. 심 후보는 두가지 제안을 받았다. 민주노총 사무총장 출마와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를 통한 정계 진출이었다. 이씨는 고심하는 심 후보에게 “정치를 하는 게 맞겠다”고 조언했다. 그는 “노동자나 노조의 자생력이 그리 좋지 못한 거 같았다. 기업별 노조 내에서도 연대성이 약화되고 있었다. 정치를 통해 동일노동·동일임금, 산별적 연대 등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봤다”고 말했습니다.
심 후보는 결국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배지를 달았다. 이씨는 “그때부터 딴생각하기 힘들더라”며 “(아내도) 진보정당을 경험한 선배가 아무도 없다 보니 모든 게 새로웠고 모든 걸 알아서 챙겨야 했다”고 말했다. ‘전업주부’ 생활의 본격 시작이었다.
18년이 흘렀다. 이씨는 자신의 가사노동을 두고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자부심을 느낀다고도 했답니다.
“정의당이 정치의 중요한 축으로 아직 안착하지 못했다. 이게 이뤄지기 전까지는 가사노동 전담이 불가피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내가 심 후보에게 ‘당신이 먹은 거 당신이 치워’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진보정당의 성장을 바라는 많은 분께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한다.”
집안 가계는 심 후보가 가져다주는 300만원으로 해결한다. 집안일을 하면서 어려운 점을 물었다. “생활을 많이 단순화했다. 반찬도 입맛에 맞는 것으로 1~2개만 만든다. 심 후보의 입맛도 그리 까다로운 편이 아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이씨는 밖에서 돌아온 심 후보에게 가능하면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심 후보는 굉장히 지친 상태로 집에 돌아온다. 안 그래도 복잡한 상태의 사람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건 피해야겠다 생각한다. 불가피하게 전달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나중에 보라’고 쪽지를 전달한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평정 상태에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라고 전했답니다.
심 후보가 먼저 물어올 때를 제외하면 조언도 자제한다. 이씨는 “당에서 공식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끼리 논의하는 게 맞다. 잘못된 판단을 내리더라도 해당 임무를 맡아 현장을 잘 아는 사람들끼리 논의하고 결정했다면 존중하는 게 옳은 방식”이라고 강조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