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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싱권투선수 박종팔 고향 프로필 나이 이정희 부인 아내 가족 식당
    카테고리 없음 2022. 8. 20. 19:44

    

    - 지난 2012년 경에 언론에 소개된 박종팔의 근황과 식당

    한국 프로복싱 사상 가장 화끈했던 파이터 박종팔이 있답니다. 프로 통산 52번 싸워 46승5패1무의 전적을 남겼는데 그중 KO승을 39번 거뒀다. 19연속 KO승이라는 진기록도 남겼다. 5패 중 KO로 진 게 4번이다. 이기든 지든 화끈했다. 박종팔은 지난달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국제복싱연맹(IBF) 설립 30주년 기념행사에서 'IBF 30년 역사를 빛낸 복서'로 선정돼 특별상을 받았답니다.


    세계타이틀전이 열리는 날은 시내가 철시하다시피 했던 '복싱의 시대'인 1980년대를 풍미했던 많은 챔피언 중에서도 그는 세계 중량급(슈퍼미들급·76.2㎏ 이하)을 지배했던 '전설'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그는 "내 인생은 3라운드다. 1라운드는 성공의 시대였다면 2라운드는 좌절의 시기였다. 나이 50 넘어 맞은 3라운드에서 이제야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고 말한답니다.

    '돈팔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부동산 갑부였던 그는 주위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재산을 다 날리고 죽* 위해 수락산을 찾았었다. 이제 그는 그 수락산에서 식당을 하며 살고 있다. 지난 12일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수락산 자락의 등산로에 있는 박종팔이 운영하는 식당 '만남의 광장'에서 그를 만났다. 염색한 티가 났지만 여전한 상고머리에 30여 년 전 한창때의 얼굴과 변함이 없답니다.

    기자의 명함을 받더니 고향과 나이를 묻는다. "와따 고향 선배님이네. 한 살 차이면 친구 뻘이라 했지만, 다른 동네는 몰라도 목포 그 동네서는 한 살 차이라도 형님 대접 안 하면 큰일 나라. 안 그렇소?"하며 명함에 메모를 한다. "이라고 안 하면 금방 잊어 부러서…." 중학교 때 가출해 서울 생활을 해왔지만 진한 남도 사투리는 여전하답니다.

    박종팔의 인생은 초등학교 5년 때 돌아가신 어머니와 깊은 관련이 있다. 복싱 선수가 된 것도, 함께 산 여자들이 모두 연상인 것도 그렇다.

    ―복싱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전남 무안 북초등학교 5년 때 자궁암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우리 집이 50마지기 이상 하는 대농이었는데 목포, 광주, 서울을 오가며 병구완하느라 그 많던 농토가 뭉텅 없어졌어요. 어린 나이지만 속이 상합디다. 중 1년 때 새엄마가 들어오자 더욱 방황했어요. 당시는 김일 때문에 레슬링이 인기라 레슬링 선수가 돼 돈을 벌면 잃은 땅을 다시 찾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처음 가출해서 광주 작은 집에 있었는데 레슬링 도장을 못 찾아 광주고 앞에 있던 복싱도장(챔피언체육관)을 다녔어요. 그때만 해도 레슬링 생각이 많았든지 복싱은 체질이 아닌 것 같아 일곱 달 만에 집에 돌아갔죠. 그러다 곧 두 번째 가출을 했는데 당시 집에서 수확한 유채씨 다섯 가마니 중 두 가마를 들고 나와 헐값인 7000원씩에 팔아 학교(학다리)역에서 서울 가는 기차를 탔어요. 나보다 열 몇 살 많은 사촌형이 84번 버스(현재 151번) 흑석동 종점에서 철물점을 한다는 것만 알고 무작정 나선 것이랍니다"

    "해거름 참에 서울역에 도착했는데 그만 못 볼 것을 봤어요. 양철통에 물방개를 넣고 물방개가 들어가는 칸에 돈을 거는 도박에 빠져 남은 돈 만 몇천 원을 몽땅 잃었어요. 길을 물어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넜어요. 다리가 뭐 그리 긴 지, 한강이 바다가 아닌가 생각이 듭디다. 다행히 사촌형 집은 쉽게 찾아 철물점 일을 했어요. 근데 복싱하라는 게 운명이었던 것 같습디마. 내가 사촌형 집에 있다는 것을 안 아버지가 쌀을 부쳐줘서 형과 함께 영등포역으로 찾으러 갔어요. 그때 수산시장 삼거리에 있는 복싱도장 간판을 보게 됐죠. 다음 날 걸어서 찾아가 봤는데 김현치 관장이 하는 동아체육관이었답니다."

    ―인생 1라운드는 행운과 성공의 시대라고 했던 상황이다?

    "딱딱 맞아 들어 가드라니까요. 사촌형이 이사 가게 돼 철물점을 그만두어야 하는데 마침 건너편 중국집 직원이 그만뒀어요. 그래서 중국집에 취직이 딱 됐어요. 운동할 시간 두 시간을 빼주고 대신 돈은 덜 받는 조건으로. 나중에 IBF 세계챔피언도 신설 단체라 슈퍼미들급 챔피언결정전에 바로 나갔고, WBA도 신설 체급이라 곧바로 결정전에 나가 벨트를 차지했으답니다"

    "복싱을 시작한 지 두어 달 만에 서울 아마추어 신인대회에 나갔고 이어 전국대회에도 나갔는데 두 번 다 동향(전남) 친구인 이효남에게 져 준우승했어요. 점수를 따지는 아마는 체질이 아닌가 보다 해서 1977년 11월26일 프로로 전향했지요. 부산에서 정용수와 4라운드짜리 데뷔전을 치렀는데 처음으로 '웃통' 벗고 뛰는 경기였죠. 그때 아마추어는 헤드기어는 안 썼지만 메리야스는 입었어야 했다"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몸이 덜덜 떨리고 링이 운동장만 하게 보입디다. 관중들 얼굴도 전혀 보이지 않고. 이런 긴장감은 나중 동양타이틀을 차지하고도 한참 더 있고 나서야 없어집디다. 좌우간 소싸움 하듯 머리를 박고 펀치를 날렸는데 2라운드에서 갑자기 상대가 안 보입디다. 내 주먹이 얼마나 강했는지 전라도 말로 '우, 아래로 몇 번 홅어 불믄' 다 나가떨어졌답니다."

    ―그러다 초창기에 된통 당했다고 들었다?

    

    "데뷔전을 치른 직후 연말 MBC신인왕전에서 KO로 2연승을 거두고 우수선수상을 받으며 미들급 신인왕이 됐죠. 그때는 한·일 신인왕전이 있어 일본에 가 일본 신인왕과 대결했어요. 1라운드 27초, 그것도 첫 펀치에 상대가 누워버렸죠. 원래 일본에서 두 게임하기로 했는데 소문이 나서 상대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복싱이 참 쉽구먼 생각했어요. 6전 만에 강흥원 선배와 한국타이틀전을 가졌는데, 2라운드에서 KO패 당했죠. 힘만 믿고 온몸에 힘을 실어 한 방을 날렸는데 카운터에 걸렸어요. 정신이 없어 경기 끝난 지도 몰랐죠. 이 패배가 나를 챔피언으로 만든 겁니다.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실감했죠. 권투가 뭔지 알게 된 것이죠. 이후 19연속 KO승을 거뒀답니다."

    ―5번의 패배 중 실력으로 도저히 안 되겠다 했던 경기는 무엇인가?

    "물론 강흥원 선배와의 게임이었죠. 나머지 4패는 준비 부족. 그러니까 계체량 실패 때문이에요. 내 평상시 체중이 84∼86㎏이어서 체급에 맞추려면 13kg 감량은 기본이고 많게는 15㎏까지 뺐어요. 세계타이틀 같은 경우는 석 달간, 동양타이틀전은 두 달에 걸쳐 감량합니다. 사우나는 몸을 곯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아주 급할 때나 했지, 운동으로만 뺐어요. 사우나는 지금도 3분도 못 있어요. 신인 때 당한 1패를 빼면 '도저히 이길 수 없다'하는 생각이 들었던 그런 상대는 없었답니다."

    ―베네수엘라 선수 오벨메히아스에게는 두 번 다 졌는데, '천적'이라는 생각은 없었던 것인가??

    "할 만한 상대였을 뿐이죠. 1982년엔가 베네수엘라에 가서 논타이틀전을 했는데 KO패 당했죠. 고지대인 줄 아무도 모르고 갔는데 그냥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이 둥둥 뜬 기분입디다. 그러다 무력하게 쓰러지고 말았죠. 두 번째 대결은 1988년 수안보에서 열린 WBA 2차 방어전이었는데 7회 버팅을 당해 이빨 3개가 나갔어요. 당연히 중단시켜야 했는데 우리 코너에서 판단 실수한 것이죠. 얼굴에 살짝 맞아도 통증이 어마어마하게 와 12회까지 버티다 KO 당했어요. 나중에 결국 앞니 2개를 뺐죠. 나를 두 번이나 이겼지만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 안한답니다."

    ―세계타이틀방어전만 10번이나 했으니 돈도 많이 벌었을 것으로 본다??

    "내 별명이 '돈팔이' 아닙니까. 갈퀴로 긁었다니까요. 내가 어머니 병구완으로 없어진 집안 땅을 되찾으려고 운동을 시작했지 않습니까. '돈팔이' 별명은 김현치 관장 때문에 붙은 것인데…."

    당시 김 관장은 박종팔에게 "니가 열심히 하면 '돈팔이' 될 거고 그렇지 않으면 '똥팔이' 밖에 안 된다"고 했단다. 그게 별명이 됐다.

    "동양챔피언 할 때인 1981년 당시 돈 3000만 원 주고 충남 당진에 반듯한 농지 1만 평을 샀어요. 돈만 벌면 땅에다 묻었지요. 무안 땅을 되사려고 했는데 그 자리에 이미 자동차학원과 공장이 들어서서 못 사서…. 그때 서울 변두리 주택이 한 채에 500만 원 했는데 동양타이틀전 하면 1500만 원에서 3000만 원 받았어요. 나는 경기 일정이 잡히면 먼저 부동산 계약부터 했답니다"

    "명의는 다 아내 앞으로 해줬는데, 국세청 부동산 투기 단속에 걸렸어요. 국세청에 가서 '복싱선수는 김득구 같이 언제 죽을지 몰라 마누라 자식 먹고 살라고 마누라 명의로 사준 거다'고 해명했어요. 담당이 '이해가 된다며 운동이나 열심히 하라'면서 알아서 다 해결해줍디다."라고 전했습니다.

    ―좌절과 시련의 인생 2라운드 이야기나 들어볼려고 합니다.

    "은퇴하고 1994년 김현치 관장이 하던 동아프로모션을 인수했어요. 주위에서 '스승이 어려운데 니가 맡으라'고 해, 생각해보니 '스승과 제자'라는 그림이 그럴듯해 보여 1억5000만 원인가 주고 인수했죠. 몇 번은 잘했는데 최재원 선수 세계타이틀매치 전초전 때문에 사달이 났어요. 파벌 싸움이 있던 한국권투위원회에서 승인을 안 해줘요, 계체를 쌀집 저울로 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관중이 2500명 들어왔고, 생중계하기로 한 MBC까지 25분 전까지 기다렸는데 끝내 경기가 열리지 못했죠. 3억5000만 원이 날아갔어요. 열불이 나서 권투위원회와 국회사무실을 찾아가 때려 엎었죠. ('구천서 씨가 당시 회장이었죠?'하고 묻자 그 양반 이름은 쓰지도 말라고 한다.) 그랬더니 4가지 죄목으로 고소해 집어넣습디다. 다행히 검사님이 복싱팬이라 선처해서 벌금 100만 원 받았어요. 구치소에서 37일 있었죠. 그 일이 있고 세상을 알아야겠다고 강남에 단란주점을 차렸는데, 이게 골로 가게 된 지름길이었답니다"

    "나는 한 살이라도 위면 형님, 밑이면 동생하고 사는 데, 전부 사기꾼들만 몰려 왔어요. 특히 기획 부동산, '10억 원 투자하면 50억 원 번다'는 식으로 꼬드겨 혹해서 돈을 주면 다음 날부터 함흥차사여. 가진 게 부동산이라, 남에게 돈 빌려 줬지만 내 신*은 지켜야 하니까 집 팔아서... 거기에 가드만. 마누라라도 모질게 했으면 됐을 텐데, 남편 오기를 아는지라 군소리 없이 땅문서 내주다 보니, 부동산 28건이 다 그렇게 날아갔어요. 천불이 납디다. 당뇨, 고혈압, 뇌졸중까지 찾아오고, 몸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땀에서 썩은 내가 나 사람이 옆에 오지 못할 정도였죠. 수락산에 올라 뛰어내려 죽을 자리를 5곳이나 물색해 놨어요. 내가 술을 먹었더라면 벌써 뛰어내렸을 거요. 그러고 있는데 누가 먼저 뛰어내립디다. 한참 방황하고 있을 때 마누라까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벌써 5년 됐답니다.

    

    ―다 털어버리고 새 인생을 잦은 계기는 무엇인가??

    "4년 전 아는 누님이 지금의 아내(이정희·56)를 소개해 재혼했어요. 나는 두 딸이 있고 이 사람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사별하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뒀어요. 내 여자들은 다 나보다 두 살 위 연상인데 일찍 어머니를 여읜 때문인지 연상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새 장가들고서도 본전 생각이 나 또 5건이나 사기에 걸려 부인 돈 30여억 원을 날렸답니다"

    "수락산 폭포 밑에 쉬러 왔다가 '건강도 나쁘니 내 땅에서 살며 휴양이라도 하라'는 지인의 도움으로 이곳에 정착하게 됐죠. 내가 잘 나가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지 않을까 생각하실지 몰라도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전에는 '돈만 잘 벌어다 주면 됐지'하는 생각이었는데 이제 가족, 가정이라는 게 뭔지 알았으니까요. 둘째 딸이 작년에 처음으로 생일 케이크 불을 꺼봤다고 할 정도로 가족과는 담을 쌓고 살았어요. 여기 만든다고 거의 개간하다시피 했어요. 처음엔 아예 쓰레기 밭입디다. 15t 트럭으로 18차례나 쓰레기를 치우고 흙을 새로 18차분을 받았어요. 이런 돌들도 다 내 손으로 쌓은 겁니다. 다시 땀을 흘리고 마음이 편안해 지니 '때깔'이 돌아온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 박종팔 프로필 이력 경력

    출생 나이
    1958년 8월 11일 (64세)
    고향 출생지
    전남 무안

    신체 키
    178cm
    소속
    동아체육관 (매니저 김현치)

    전적
    52전 46승 (39KO) 5패 1무

    수상
    한국 미들급 프로복싱 신인왕
    前 한국 미들급 챔피언
    前 OPBF 미들급 챔피언
    前 IBF, WBA 수퍼 미들급 세계 챔피언

    대한민국의 권투선수. 한국 복싱계의 전설이자, 1970~80년대 한국 권투 중량급을 제패한 하드펀처였습니다.

    본관은 무안(務安).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매곡리 수반마을에서 태어났다. IBF, WBA 슈퍼 미들급 챔피언이었다.

    - 과거 프로복싱 커리어

    1977년 프로 복싱에 데뷔, 78년 최창백에게 3라운드 KO승을 따내고 한국 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그 이후 강력한 펀치를 앞세워 KO승을 거듭, 18연속 KO승을 기록한다. 백인철의 26연속 KO승에 이은 국내 2위에 해당하는 기록. 아시아권에서는 거의 적수가 없을 정도로 펀치의 파괴력이 좋았다.


    하지만 미들급 같은 중량급은 동양인 선수들이 세계 정상권에 도전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많았고 박종팔도 자신의 천적, 81년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풀헨시오 오벨메이야스와의 경기에서 8라운드 KO를 당하며 세계 정상권과의 격차를 실감한다. 동양권외에 서양쪽이나 다른 해외의 사람들이 동양인에 비해 골격이나 체격이 좋은터라 체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세계와의 격차는 클 수밖에 없었다. 박종팔 본인도 인터뷰에서 "체급은 같다하더라도 서양, 남미 등의 비동양권 선수들은 체격이나 골격이 나보다 좋은게 분명했다."라고 언급할 정도였습니다.

    대 오벨메히야스 1차전. 10라운드 경기로 진행되었다. 박종팔은 베네수엘라의 높은 해발 고도에서 경기를 치르다 보니 몸이 붕붕 뜨면서 제대로 펀치가 나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오벨메이야스와의 경기는 세계 타이틀 전초전의 성격이었고, 이때 이겼다면 미들급의 무적최강 "도살자" 마빈 해글러와 타이틀 매치를 치를 수 있었지만 이 경기에서 패배하면서 무산되었는데 이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 허나 오벨메이야스도 해글러를 만나기 전까진 26전 26승 KO율 100퍼센트의 강자였지만 해글러에게는 처참하게 2번씩이나 KO패를 당했으니 상대적인 격차를 알 수 있을 것이랍니다.

    이후 보유중인 동양챔피언 타이틀을 지속적으로 방어전을 치르면서 기회를 보다 숙적 나경민에게 7라운드 KO패를 당한다. 하지만 4개월 후 다시 리턴매치를 벌여 4라운드 KO승을 거두면서 동양타이틀을 탈환한다. 이때 국내선수들끼리의 경기임에도 박종팔과 나경민이라는 수준급의 선수들의 기량, 그리고 미들급의 파워넘치는 매력을 통해 경기자체는 상당히 흥행에 성공했답니다.

    - IBF 세계 챔피언이 되다

    이후에 박종팔은 신설된 복싱협회 IBF에 진출한다. 체급은 미들급 바로 윗 체급인 슈퍼 미들급. 당시 IBF는 먼저 설립된 WBA나 WBC에 비교해 봤을때 명성이나 인지도, 흥행, 그리고 선수기량면 등 모든 면에서 뒤처진 수준이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지만 동양권 선수가 넘보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중량급 체급이었다. 박종팔은 세계정상권과의 격차를 고려해 신설된 IBF에 들어갔고, 새롭게 추가된 체급, 슈퍼미들급에 뛰어 들어 결국 해당 체급 초대 챔피언 미국의 머레이 서덜랜드와 타이틀 매치를 치른답니다.

    

    84년 한국에서 열린 경기에서 경기 초반 한차례 다운을 당했지만 강력한 펀치를 앞세워 4번이나 다운을 뺏어내며 11라운드 KO승을 거두고 월드 챔프에 등극한다. 이후 8차례의 방어전을 성공했고 이때가 가장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파이트 머니의 수익 자체도 엄청나게 많아서 은퇴 이후에 재산이 90억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답니다.


    8차례의 방어전 상대 중 세계 정상권 선수는 없었으며 우물 안에서 벗어났다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했지만, 나름대로 근성과 체력을 겸비한 선수들이었고 쉽게 볼만한 상대들이 아니었다. 일례로 머레이 서덜랜드의 경우 미들급의 강자 중 한 명인 헌즈와의 대결에서 패배했지만 판정까지 버틴 바 있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이 동양권 선수들이 비동양권 선수들과 선천적인 파워를 극복하고 싸운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만난 선수들 중 비교적 난적이었던 린델 홈스나 비니 커토와의 일전 등이 주목할 만한 경기였다.

    린델 홈즈와는 한국에서만 두 번 경기를 가졌는데, 첫 번째 경기에서는 크게 고전하다가 경기 중에 일어난 박종팔의 부상으로 경기가 취소되었고, 마지막 방어전인 8차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에도 박종팔이 크게 고전하다가 스플릿 디시전 판정으로 겨우 승리하였다. 린델 홈즈는 이후 박종팔의 타이틀 반납으로 공석이 된 IBF 수퍼미들급 챔피언을 차지하며 활약한답니다.

    비니 커토도 세계정상권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양권 선수가 손쉽게 이길 수 있다고 할 수 없는 선수였다. 그러나 박종팔이 타이틀전에서 두 번을 만나 모두 승리했으며, 이 중 두 번째 경기는 미국 LA에서 열렸는데 이 때의 승리가 한국 복싱의 '유일한 미국 원정 타이틀 매치 승리'이다. 2021년까지 미국 원정 타이틀 매치의 결과는 1승 27패다. 물론 모두 실력에 의한 패배라고 할 수 없으나 대부분이 그러했으며 김득구 선수의 경우 맨시니와의 일전에서 사망에 이르렀을 정도로 미국원정은 한국에게 그야말로 무덤길이라고 불렸답니다.

    비니 커토와의 2차전. 3라운드에서 다운을 빼앗아내며 기선제압에 성공했고, 이후 4라운드 시작 직전 비키니 차림의 스트리커 여성이 링위에 난입해 춤을 추고 심판에게 섀도 복싱을 하는 해프닝을 통해 잠깐의 휴식을 더 취하는 행운도 따랐다. 경기는 박종팔의 극적인 15회 KO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자진해서 IBF 타이틀을 반납했는데, 박종팔의 경우 IBF에 소속되어 성실히 챔피언으로서 그 임무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 상황은 IBF 타이틀을 반납하는 상황이 더 나았다. IBF는 앞서 설명했듯이 WBA나 WBC에 비해 모든 면이 떨어졌는데 WBC나 WBA의 높은 수준을 감당하기 벅찬 한국 선수들이 IBF로 많이 진출했고 결과적으로 한국선수들의 IBF 챔프 양산이 벌어졌답니다.

    세계 챔프가 상당히 어려운 것을 감안할 때 IBF 챔프의 양산은 세계 챔프의 질을 떨어뜨렸고, 더군다나 한국 선수들이 많이 진출해 한국 선수들끼리 타이틀 매치를 하거나 해외선수라도 선수 기량이 떨어지는 등의 경기 수준이 함량 미달인 경기가 더러 있었다. 또 80년대 IBF 챔피언이었던 권순천의 방어전 당시 해당선수가 아니라 다른 수준 낮은 선수를 둔갑시켜 내보낸 경기가 있던 사건은 한국이 IBF에 대한 실망감과 불신이 대폭 확산된 계기였답니다.

    - WBA 챔피언 등극과 은퇴

    WBA에서 슈퍼 미들급이 신설되자 박종팔은 IBF 타이틀을 반납하고 WBA로 진출했고, 슈퍼 미들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멕시코의 헤수스 가야르도와 경기를 치렀다. 머레이 서덜랜드 전과 같이 경기 초반 다운을 당했지만 이후 수차례 다운을 빼앗아내 2라운드 KO승을 거두며 다시 한번 월드 챔프에 등극한다.

    가야르도전 하이라이트. 초반부터 난타전이 이어지는 화끈한 경기였답니다.

    이후 폴리 파시레론과의 방어전도 승리했다. 이 때까지가 박종팔의 리즈시절.

    하지만 2차 방어전 상대가 체급을 옮겨가며 따라온 숙적 오벨메이야스로 결정되고, 1988년 5월 23일 수안보 와이키키 특설링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박종팔은 3번이나 다운 당한 끝에 3:0 판정패를 하며 챔피언 타이틀을 상실한다. 이후 한국 중량급의 강타자 중 한명인 백인철과의 논타이틀 매치에서도 KO패하며 현역에서 은퇴한답니다.

    -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총 전적 46승(39KO승) 1무 1무효 5패(4KO패).

    

    세계급 선수와의 경기는 실력차이 때문에 별로 없지만 단순 전적으로만 볼때 굉장히 훌륭한 복서였고 중량급의 묘미답게 파워넘치는 펀치력을 앞세워 46승 중에 39번이 KO승리일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보여주었다.


    테크닉도 수준급이었고, IBF 및 슈퍼 미들급 신설을 통해 자신의 무대를 펼칠 수 있었던 운도 작용했지만 종합적으로 평가했을 때 한국 복싱의 한 시대를 풍미할 만큼 매우 우수한 선수였습니다.

    다만 다소 약한 수비력이나 그다지 강하지 않은 정타를 맞고도 바로 다운되는 맷집 문제 등은 약점이라고 꼽을 수 있다. 다운 장면들을 보면 의외로 강하지 않은 수준임에도 쓰러진 경우가 있다. 이는 백인철이나 황준석(권투선수)등 동시대 비슷한 체급에서 활약한 선수들과도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말이 필요 없는 한국 복싱의 레전드이지만, 아무래도 세계 최정상권과는 격차가 있었다. 예컨대 당시 그의 체급에서 탑클래스 문지기 역할을 하던 오벨메히야스는 마빈 해글러에게 두차례나 KO패를 당할 정도로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박종팔을 상대로는 반대로 두 번의 매치 전부 유리한 게임 끝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물론 박종팔이 동양권 선수로는 어느 정도 세계 격차를 줄인 것은 사실이고, 이것만으로도 한국 복싱의 레전드가 되기에는 손색이 없답니다.

    - 은퇴 이후

    박종팔은 은퇴 이후에 자신의 재산으로 이런 저런 사업을 하다 큰 손해를 보기를 거듭하다 결국 전재산을 잃게 된다. 강남에 열었던 술집도 폭삭 망했다고 한다. 복싱 외에 다른 것에 대해 경험이나 기술이 전무했기에 어려웠었고 사람들의 사기행각에도 많이 휘말렸었다.[5] 전재산을 잃은 후에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고 몸도 성치 않았지만 재혼한 부인덕에 다시 삶을 되찾아 복싱체육관을 운영했었다.

    2018년 8월 현재는 장안동 복싱체육관 및 수락산 인근에서 운영하던 고깃집 모두 접고 불암산 기슭에 1만여 평 땅을 사 건강힐링센터를 운영하는 중. 한국제주권투위원회(KJBC) 상임고문이기도 하다. 가끔씩 지상파나 케이블 TV에 나오기도 했는데 중간중간 녹슬지 않은 복싱 실력을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핸드스피드는 현역 복서들과 비교해도 여전히 전혀 꿀리지않는 수준. 하지만 스텝은 조금 어색하게 보이는데 다리가 아래 서술된 이효필과의 막장매치 이후 많이 불편해졌기에 그렇다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 이효필과의 악연

    은퇴 이후 2003년 이효필과 이벤트매치로 이종격투기 시합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격투기가 흥행하는 종목이 아니였고 침체되어있는 격투기시장을 살리기 위한 떡밥매치로 대한민국 복싱계에서 화려한 전적을 올렸던 박종팔과 대한민국의 이종격투기 1세대였던 이효필과의 매치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경기 전 이효필 측에 의해 둘은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나름 언론의 주목도 받고 그런 훈훈한 매치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답니다.

    희대의막장매치를 벌이며 대한민국 격투기계에 흑역사를 만들었답니다.

    평소 이효필은 자신보다 잘 나가는 박종팔에게 큰 질투심을 품고 있었고 박종팔은 이효필을 그냥 절친한 친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생각없이 경기에 나섰다가 뒤통수를 거하게 맞고 변을 당한 것. 이 경기 이후 박종팔은 다리가 부러져 큰 수술을 받게 되었고 지금까지 다리가 불편하다고 한다. 경기가 끝난 후 이효필은 룰대로 했다 뭐가 문제냐 라는 등 박종팔을 도발하는 발언을 일삼으며 자기도 모르게 무규칙 격투단체에서 하던 버릇이 나왔다라고 변명하며 스포츠정신에 어긋난 발언을 일삼았고 그 다음 떡밥으로는 마이크 타이슨이나 리즈시절의 최홍만 등을 지목하였으나 매치는 성사되지 않았답니다.

    이후 2013년 대한민국 화해 프로젝트-용서에 출연했다. 이효필의 진심없는 사과에 박종팔은 끝내 사과를 받지 않았지만, 방송 막판에 이효필의 사과에 마음의 문이 열렸다고 언급 화해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프로 자체가 마지막에 밑도 끝도 없이 화해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각본상 어거지로 화해에 응했을 가능성도 높답니다.

    - 유튜브 및 예능 출연 내용

    2022년 유튜버 김계란과 함께 피지컬 갤러리에서 복싱 관련된 컨텐츠인 얼굴 때리는 그녀들에서 감독으로 함께 컨텐츠를 진행하고 있으며 생활체육대회 출전을 목표로 제자를 양성중에 있으며 잽을 피하는 숏츠가 조회수 400만을 넘기는 등 잠깐 화제가 된 적이 있답니다.

    2022년 4월 30일 MBN의 국대는 국대다에서 이벤트매치로 현역 WBC 아시아 웰터급 실버챔피언인 정민호 선수와 대결에서 패했다. 라운드는 2분 4라운드에 헤드기어 착용을 하였으며 상대선수인 정민호 선수도 페이스 조절을 하며 많이 봐 준 경기였으나 60대의 노장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날카로운 카운터와 압박능력 등을 보여주었으며 체력적인 문제와 더불어 경기를 준비하는 동안 종아리 근육이 찢어지는 등의 부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경기를 마쳤다. 경기가 끝난 후 정민호선수는 박종팔 선수에게 큰 절을 하며 선배에 대한 예우를 표현하였고 박종팔은 그런 후배의 등을 두들겨주며 격려하는 훈훈한 장면과 함께 졌지만 잘 싸운 경기로 관중들도 박종팔의 열정에 기립박수를 보내는 등 감동적인 경기를 만들어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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