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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현정 전남자친구 아나운서 남편 정대선,정주영 가계도 아내 변중석
    카테고리 없음 2022. 8. 17. 18:54

    

    정대선 HN(옛 현대BS&C) 사장의 아내인 노현정 전 아나운서가 아들과 함께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부인인 고 변중석 여사 15주기 제사에 참석했다.


    변 여사 15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2022년 8월 16일 범(汎)현대 일가가 코로나19 방역 지침 준수를 위해 시차를 두고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택에 모였다. 그동안 변 여사 제사는 정 명예회장 제사와 함께 3월에 지냈지만 지난해부터 따로 지내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답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장손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었다. 정 회장은 이날 오후 5시 35분께 아내 정지선 여사, 차녀와 함께 청운동 자택에 도착해 제주(祭主)로 범현대 일가를 맞이했다. 이들은 약 30분간 머문 뒤 차를 타고 떠났다.

    이어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부부가 자택에 들어섰다. 대부분의 인사들이 취재진에게 얼굴을 비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지만 정 이사장은 자택에 들어서면서 취재진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답니다.

    곧이어 정명이 현대커머셜 사장, 정성이 이노션 고문,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오후 6시8분께 정대선 사장과 노 전 아나운서가 아들과 함께 카니발 차를 타고 등장했다. 노 전 아나운서는 옥색 한복을 입고 검은색 작은 핸드백을 든 차림이었답니다.

    노 전 아나운서는 아들과 동행했는데 엄마보다 훌쩍 큰 키가 눈길을 끌었다. 그는 2003년 KBS 29기 공채 아나운서 출신으로 지난 2006년 정대선 사장과 결혼하며 방송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2007년, 2009년 득남했답니다.

    이어 오후 6시20분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입장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도 청운동 자택을 찾았다. 정몽규 HDC그룹 회장도 청운동을 찾았답니다.

    범현대가가 모이는 것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21주기를 맞아 추모행사를 연 지난 3월 20일 이후 약 5개월 만이다.

    다만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불참한 것으로 알려졌다.

    1) 정주영의 프로필과 가족관계는?

    출생 나이 생년월일
    1915년 11월 25일
    고향 출생지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지금의 강원도 통천군 로상리)

    사망 날짜
    2001년 3월 21일 (향년 나이는 85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

    본관
    하동 정씨

    아산(峨山)

    직업
    기업인
    학력
    송전공립보통학교 (졸업)

    병역 군대
    해당 사항 없음
    부모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

    형제자매
    남동생 정인영, 정순영, 정세영, 정신영, 정상영
    여동생 정희영

    배우자
    변중석

    자녀
    장남 정몽필
    차남 정몽구
    삼남 정몽근
    장녀 정경희
    사남 정몽우
    오남 정몽헌
    육남 정몽준
    칠남 정몽윤
    팔남 정몽일
    차녀 정정인
    삼녀 정정임

    신체 키 몸무게 혈액형
    175cm, 72kg, O형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4

    종교
    무종교 → 개신교

    대한민국의 기업인. 현대그룹의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으로, 이병철 삼성그룹 초대 회장과 함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동생들과 아들들이 모두 회장이고, 생전 대한민국 최고 부자였던 점을 통해 왕회장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하답니다.

    현대그룹의 괴물같은 성장이 이뤄지던 1970년대 전성기 시절[7]에는 다른 재벌들도 현대가 모든 사업을 수주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건설 사업 의뢰가 들어온 정주영에게 하청을 받으러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며, 현대의 하청회사로 시작해 중견기업이 된 회사들이 많아서 진짜 회장들에게 왕 대접을 받던 것이랍니다.


    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딛고 일어서서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재벌을 일군 역사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처절한 가난 속에서 이루어 낸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산업화의 상징처럼 기억되는 인물이다. 현대가만큼 유명한 삼성의 이씨 일가는 철저하게 정주영 개인의 자수성가로 성장한 현대와 달리 예전부터 이미 부를 가지고 있던 집안이었던지라 인기도가 상대적으로 저조하답니다.

    

    애초에 삼성의 기반부터가 이병철 전 회장이 본인의 부친에게서 받은 지원에서 일으킨 사업에서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큰 기업을 이루고, 대한민국 최고의 부호가 되었음에도 평생 동안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살며 많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기업인 중 하나다. 회장 재임 시절 한 번은 자신의 집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는데,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어서 어이가 없어진 도둑이 "에이~ 무슨 왕회장 집이 이래?" 라고 말하고 그냥 가버렸다는 일화가 있답니다.

    1998년에 소 떼를 이끌고 방북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까지 유치한 대북 사업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또한 정주영이 추진한 대북사업이 금강산 관광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랍니다.

    2006년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도 포함되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위대한 아시아인들을 선정한 것이며, 리스트에 포함된 한국인은 정주영, 강철환, 백남준 총 3명이다. 또한 한국갤럽이 2019년에 조사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리스트에서 기업인 신분으로는 최고 순위인 전체 6위에 오르기도 했답니다.

    단순히 사업가를 넘어서 대한민국 건국 이후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위인들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울산광역시에는 그의 호를 딴 아산로가 있답니다

    - 정주영의 생애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의 슬하 6남 1녀 중 첫째이자 집안의 장남이자 장손으로 태어났답니다.


    그의 호는 고향 마을 아산리의 이름을 딴 '아산(峨山)'. 현대그룹이 전국 곳곳에 세운 아산의료원도,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 앞 태화강을 따라 동구와 북구를 연결하는 도로인 아산로 역시 바로 이 호를 딴 이름이다. 이것을 보고 충청남도 아산(牙山)시에서 온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충남 아산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긴 하지만 인주면에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이 있다. 다만 시내에 대형 의료 기관이 없어서 이왕이면 아산병원 좀 들여달라고 절규하는 아산 시민들이 많답니다.

    송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즉 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다만 당시는 초등 의무교육이 없고 보통학교 취학률이 약 4%[11]였던 시절이라 학력 인플레가 심하게 일어난 2000년대 이후는 물론, 그래도 고등학교는 보내려고 했던 1970, 1980년대와도 크게 괴리가 있답니다.

    1929년 기준, 조선인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19.9%밖에 되지 않았으며, 한반도에 거주하는 내지인(일본인)의 초등학교 취학률이 99%에 달했던 것과 극히 대조된다. 이를 고려하면 정주영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준 상위 20%의 교육을 받았던 셈이다. 최소한 비율만 따졌을 때, 2022년 기준 고졸은 물론이거니와 어지간한 대학 학력과도 비견할 만한 수준이 된답니다.

    그럼에도 정주영의 학력이 자꾸 부각되는 것은 다른 재벌가 총수보다 학력이 처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LG의 구인회 회장의 경우 엄밀히 따지면 정주영과 학력이 같지만, 그래도 고등보통학교 3학년 중퇴라 고졸로 쳐주는 느낌이고, 무엇보다 집안이 이름높은 양반가였다. 롯데 신격호 회장도 고등보통학교는 나왔다. 이들보다 한 세대 아래지만,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아예 연세대학교를 나왔답니다.

    무엇보다도 시대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과의 차이가 부각되어 그런 면이 크다. 이병철은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퇴라지만 도일하여 와세다대학 정문을 밟아봤는데, 이 시대 기준으로는 대학 중퇴도 어마어마한 스펙이다. 당대 조선인 입장에서는 최상위권 스펙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이병철과 재계 1, 2위를 다투니, 호사가들 사이에서 자연히 '초졸 vs 대졸' 식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랍니다.

    어찌되었든, 정주영이 초등학교만 졸업한 반면, 동생들의 학력은 좋은 편이다. 둘째 동생 정인영은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을 중퇴, 넷째 동생 정세영은 고려대학교를, 막내 정상영은 동국대학교를 각각 졸업했다. 요절한 다섯째 동생 정신영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퇴사 후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유학 중 장폐색증으로 갑자기 생을 마감했답니다.

    맏형의 이런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동생들이 죽을 때까지 맏형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리고 오히려 정주영이 둘째 동생의 도움을 받아서 정인영은 그룹 2인자 취급에 유일하게 정주영과 대립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아버지가 대학을 나와도 실업자가 된다고 가업을 장남에게 상속하고 책임을 지우려고 했는데 그게 싫어서 가출했던 인물이라 여유가 생기면 동생들을 챙기긴 했어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면서까지 희생적으로 챙기지는 않았다. 애초에 정주영은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되면 공부를 해서 학력을 올리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본인이 하기 싫다고 안 했답니다.

    젊은 시절에는 집안의 돈을 훔쳐서 가출한 적도 있는데 부친이 소를 판 돈인 70원이다. 후에 소 떼를 몰고 방북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원래 소 한 마리에 이자를 1,000배로 쳐서 두 차례에 걸쳐 총 1,001마리를 올려보냈다. 이후 얘기가 나온 바로는 모두 암소인 데다가 새끼를 밴 소여서 정확히는 1,001마리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서울에서 경리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도로 끌려간 적도 있다. 이때 아버지는 "대학을 나온 놈도 실업자가 되는 판국에 너 같은 조선놈이 올라간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랍니다

    게다가 넌 장남이고 농사를 지어야지." 라면서 타일렀다고 한다. 물론 결론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말대로 했다면 지금의 현대도 없었겠지만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니었다. 이후 다시 가출해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 일을 해 돈을 벌며 서울에 정착했다. 성북구 고려대학교 본관 공사장, 용산역 근처 풍전 엿공장(현재의 오리온)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답니다.


    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福興商會)'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노름에 빠진 외아들에게 실망한 쌀가게 주인이 성실하게 일해온 정주영에게 가게를 매도하여 3년 뒤 쌀가게 '경일상회'를 차렸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하지만 얼마 후 일제가 쌀 배급제를 시행하면서 자연스레 가게가 문을 닫았다. 이후 '아도 서비스'(ART SERVICE)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직원이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하였답니다.

    

    이 중에는 윤덕영,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총장, 박흥식의 차도 있었다. 때문에 후일 아도 서비스에 불이 나 입고 됐던 차들이 모두 타버렸을 때 정주영이 윤덕영의 자택인 벽수산장과 조선총독부에 직접 찾아다니며 차값을 갚겠으니 시간을 달라고 빌러다녔다고 한다. 박흥식은 자신을 찾아온 정주영에게 화신백화점이 전소됐다 재건했던 이야기와 사업 상의 조언을 해주며 격려를 해줬다고 한다. 그리고 박흥식은 오히려 화신백화점의 자동차는 모두 정주영의 공장으로 보내 수리하도록 배려했답니다.

    아도 서비스 화재로 건물과 수리 중인 자동차들이 전소해 버리는 일이 발생했을 때 다행히 평소에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후원인이 거금을 빌려줘 재기에 성공했다. 여기에도 일화가 있는데, 정주영이 쌀가게를 하면서 알게 된 후원인 오윤근은 사람보는 눈이 좋아 돈을 빌려주고 떼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답니다.

    허나 처음 그에게 빌린 돈으로 세운 공장이 날아가자 정주영이 그를 찾아가 다시 돈을 빌려달라면서, "여기서 내게 빌려준 돈을 떼이면 당신 이력에 흠이 생기지만 다시 빌려주면 그 돈으로 재기해서 갚겠다" 라고 했다. 이 말에 후원인도 자신이 돈을 떼인 적이 없다는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돈을 빌려줘야겠다고 하며 선뜻 빌려주었고, 정주영은 약속대로 돈을 갚았다. 둘 다 보통 비범한 인물이 아닌 셈이랍니다.

    - 정주영은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전설

    미군정 말기인 1947년에는 서울에서 건설 회사를 차렸다. 지금 현대그룹의 토대가 되는 현대토건사이다. 당시 은행에서 큰 돈을 빌리는 사람들을 봤더니 건설업자가 많은 것을 보고 자동차 수리공장 사장이 순식간에 건설사를 세운 것이다. 정주영 본인의 성실함과 근성에 한국전쟁 시기에 주한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한 손아랫동생 정인영의 도움으로 주한미군 관련 공사를 거의 싹쓸이하면서 창립 10년 만에 전국 10대 건설사로 성장한답니다.

    회고록에 의하면 미군으로부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한겨울에 UN묘지에 잔디 입히는 일을 발주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한국의 여건상 겨울에 잔디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에서 전부 거절한 것을 정주영은 받아들였다. 일단 파란 풀로만 덮으면 된다는 확인을 받은 후 트럭 30여 대를 동원해서 밭에 나있는 보리 싹을 사다가 심어서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고 한다. 이후 겨울이 지나자 보리를 전부 갈아엎고 다시 잔디를 심어 마무리했다. 이 일이 화제가 된 후 미군으로부터 많은 일을 발주받았답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정주영의 가장 큰 시련은 바로 전후에 수주했던 고령교 공사였다. 1935년에 처음 개통됐지만 6.25 전쟁 때 폭파되어 1953년부터 현대건설이 복구에 나서게 되지만, 사실상 말만 복구 공사지 실제로는 신축 공사에 가까웠다. 당시 복구 비용은 5,478만 환(현재 약 547억 원)에 달답니했다


    더군다나 이는 당시 정부에서 발주한 공사 금액 중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금액이었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큰 공사를 한 일이 전무한 데다가 건설 장비도 부족했고, 애써 박은 교각은 급류에 휘말려 사라져 버리는 사고까지 일어난 데다가 물가도 자꾸 뛰어올라 인부들에게 줄 월급마저 줄어 인부들이 파업까지 했을 정도였답니다.

    그럼에도 정주영은 "사업하는 사람은 첫째도 신용, 둘째도 신용"이라 말하며 막대한 사채를 쓰고, 동생 정순영의 20평짜리 기와집과 매제 김영주의 20평짜리 집, 옛 자동차 수리공장 자리까지 팔아가면서 그 모든 자금을 공사에 쏟아부어 1955년에 완공시켰으며 그렇게 점점 사업 규모를 확장하여 현대그룹을 만들어낸답니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미포만 해변 사진과 축척 지도,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를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서 유럽을 돌았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소를 건립하라고 지시했다.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짓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해봤지만 이번만은 해결책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며 "무조건 해내라"라고 했다 한다. 아래의 일화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해외 온갖 곳을 돌며 허풍을 쳐서라도 어떻게든 조선소 지을 돈을 빌리고자 했던 정주영 회장의 눈물겨운 스토리인 것이랍니다.

    

    정주영은 영국에서 바클리스 은행과 4,300만 달러 차관 도입을 협의했지만 은행의 최종입장은 거절이었다. 그 뒤 정주영은 1971년 9월에 바클리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박 컨설턴트 회사의 회장인 롱바텀을 찾아갔다. 롱바텀의 추천서가 있으면 영국의 은행에게 쉽게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거북선 이야기가 나온답니다.


    정주영은 롱바텀에게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다"라며 우리는 할 수 있으니 믿어달라고 설득하여 추천서를 받아냈다. 그럼에도 바클리스 은행에서는 "배를 구매하겠다는 사람을 먼저 찾아와라. 배 주문서를 가져오면 차관을 빌려주겠다." 라고 얘기했답니다.

    정주영은 롱바텀에게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의 처남인 리바노스가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26만톤짜리 선박 수주계약을 따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돌려준다는 파격적 조건이었다. 리바노스도 그의 말을 듣고 조선소도 없는 사람에게 일종의 도박을 건 것이다. 정주영은 그에 대해 "나보다도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도 보증을 서줘서 바클리스 은행에서 차관을 빌렸고, 정주영은 "우리가 지금 조선소는 없지만 배를 계약해주면 그걸로 돈을 빌려 조선소를 지은 뒤 배를 만들어 주겠다" 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실현한 것이었답니다.

    그 뒤 정주영은 1972년에 울산 조선소 건설에 들어갔다. 조선소 건설 과정에서도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자서전에서는 비가 세차게 내리던 어느 날 밤에 차를 타고 현장으로 가다가 길에 쌓인 자재 더미를 피하려다가 차가 전복되어 바다에 빠져 하마터면 익사할 뻔한 사건을 당했다고 한다. 다행히 차에서 금방 빠져나왔고 현장에 있던 직원들의 신속한 구조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길에 방치한 자재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이 다름 아닌 회장이었다는 사실을 안 직원들은 모가지가 날아갈 생각에 벌벌 떨었답니다.

    그렇지만 정주영은 되려 물이 참 시원하다고 농담을 던지며 그 직원들에게 포상을 내렸다고 한다. 울산 조선소에서 진수하는 첫 호선도 정회장이 직접 지휘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국내에 내로라 하는 선장들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서 선뜻 시운전을 안 맡으려고 해서 본인이 직접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소의 완공과 함께 유조선이 건조되어 나오는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는데, 도크가 부분 완공되면 그 자리에 바로 철판을 대어 배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 하여 도크와 배를 동시에 만든 것이랍니다.


    서산간척지 공사 당시 특유의 뻘지형으로 인해 매립이 잘 안되자 큰 폐유조선 두 척을 착저시켜 둑으로 이용해 매립공사를 한 후 폐선을 분해해 판매한 정주영식 공법으로 유명하다. 이 공법은 나중에 서해에서 조수간만으로 인해 방조제 막바지 공사가 지연 되었을 때나 홍수시 긴급 제방을 만들 때 등으로 응용되었답니다.

    알파 엔진을 개발할 때의 일화도 유명한데, 미쓰비시의 구보 회장이 로얄티 반값 할인을 조건으로 연구소를 닫으라고 요청했을 때 성공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밀어붙여 결국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개발 엔진인 알파 엔진이 탄생했다. 이런 조건을 내거는 걸 보니 분명히 해볼 만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후일 밝힌 바 있답니다.

    당시는 오일쇼크로 인해 중동에 돈이 엄청나게 몰린 상태였다. 그래서 한국의 건설사들은 과감하게 중동 시장에 진출했는데 그 선두에는 현대건설이 있었다. 타국 건설사들이 합리적으로 100만 달러를 입찰하면 현대건설은 절반도 안 되는 40만, 30만 달러를 적어내는 식으로 공사들을 따냈다. 결과물도 선진국의 건설사들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공사를 맡게 되었고, 이 오일머니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크게 도약시켰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산업항 공사는 수주 금액이 당시 대한민국 정부 전체 예산의 25%에 달할 정도로 대형 공사였답니다.

    정주영은 공사비를 아끼고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한국에서 모든 기자재를 마련해 바지선에 실어서 주베일까지 옮기기로 결정했다. 쉽게 생각하면 커다란 뗏목에 기자재들을 나누어 담고 앞에서 큰 배가 끌면서 12,000km를 달려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태풍이 자주 부는 필리핀 해협, 인도양, 걸프만 등에서 얼마든지 난파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천운으로 이 계획이 잘 실행되었다. 일이 잘못 되었으면 현대그룹은 없었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산업 진출, 조선소 건설, 주베일산업항 건설 등 정주영 회장은 사운을 걸고 이루어 낸 일들이 많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일등 공신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경쟁 도시는 일본의 나고야였는데, 나고야 올림픽 유치위원회에서는 비싼 시계를 IOC 위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며 홍보를 했다. 그럼에도 정주영은 IOC 위원들이 머무는 숙소에 꽃바구니만을 돌리면서 홍보를 했다. 승산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막상 다음날 리셉션에서 각국 IOC 위원들은 시계보다 꽃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 측 유치단에 관심을 보여서 일본 측이 당황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주영은 물량보다는 성의로써 친밀해지자며 과감히 밀어붙였고, 결국 최종 투표에서는 서울이 나고야를 52-27로 누르고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에 성공하였답니다


    이명박의 자서전에서는 정주영은 사업가 시절에 정치인들이 기업인들의 단물을 빼먹으면서도 기업인을 무시한다고 깊이 상심했으며,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해 이러한 인식을 바꿔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명박은 걸프전 발발로 인한 이라크 건설공사 수금 미수로 물러나고 드라마 '야망의 세월'로 얻은 인기를 발판삼아 정주영이 미워하던 민자당에 입당, 같은 14대 총선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당연히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답니다.

    - 정회장의 말년의 행보

    1987년 명예회장으로 은퇴한 정주영은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노태우 정부 말기부터 갑자기 역대 정권에 바친 비자금을 공개하면서 슬슬 레임덕 증상을 보이던 노태우 정권을 곤경에 빠뜨렸다. 노태우가 취임 당시 가족들 재산을 포함하여 전 재산이 5억 2천이라 했는데 정주영은 매년 100억을 갖다 바쳤다고 한다. 그리고 문민정부 시절 드러낸 결과 그가 받은 비자금은 스스로 고백한 액수만 해도 5천억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통일국민당을 조직하고 이주일을 영입하는 등 노력 끝에 창당 한달만에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1석을 얻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고, 본인도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현대그룹 임직원과 가족을 노골적으로 동원하여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다른 재벌들의 경계를 받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마침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금전 정치의 한계를 보여주며 낙선하였다. 개표 직후 정주영은 "당원이 1,200만명인데 득표수가 400만표(정확히는 388만표 정도)라니 우리 당원들은 다 어디에 투표한 것인가" 하며 고개를 떨구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김영삼이 받은 표가 1,000만표가 조금 안 되었으며 정주영의 낮은 득표율은 예측이 되었기는 했지만 여론조사가 제각기 달리 나왔던 이유도 있었고 13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4자 필승론" 같은 아이디어를 내세운 것도 과학적 여론조사가 제대로 없어서였답니다.

    여론조사는 사회 전반에 대한 분석에 바탕을 둔 의미있는 표본 추출과 세련된 조사기법 등 상당한 노하우를 필요로 한다. 사실 당원이 1,200만명에 이르기는 했지만 대선 승리를 위해 억지로 불려놓은 숫자인지라 이들이 표를 제대로 줄 리는 만무했다. 그가 연고가 있는 강원도 중에서도 춘천시, 원주시, 횡성군 단 3곳에만 1위를 했을 뿐 다른 곳에서는 모두 양김을 넘지 못했답니다.

    정주영은 현대 직원들이 모두 자신을 찍고, 주변 사람들을 조금씩만 설득하면 실제로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특히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의 '우리가 남이가' 발언으로 인해 14대 대선은 유례없는 지역감정 싸움이 되어 타격을 많이 입었다. '주영 찍으면 (표가 갈려서) 대중된다'는 교묘한 흑색선전에도 시달렸답니다.

    특히나도 당시 노태우 정권은 총선 당시 보여준 현대그룹의 조직력을 경계하여 공권력을 동원하여 현대그룹 직원들의 부정선거 사례를 대대적으로 폭로했고, 비자금을 폭로하는 등 현대그룹을 압박하여 정주영 선거운동 조직의 손발을 잘랐다. 울산 같은 대표적인 현대그룹의 도시에서조차 현대의 임직원 수보다 적은 표가 나오자 정주영은 매우 분개했다고 한답니다.

    컴퓨터 선거 조작이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증거가 불확실하여 김대중도 동참하지 않았다. 다만 대선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정주영 스스로가 국민들에게 그다지 신임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 가난하였다 하더라도 재벌 출신인 그가 얼마나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을지는 의문부호가 붙었다. 또한 기업 경영에서의 성공과 국가 운영, 즉 정치는 매우 다른 분야임이 자명한데 경제계 출신이 어찌 정치를 할 수 있겠냐는 인식이 많았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후에 진행된 정치 보복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의견도 있다. 재력이 이미 있던 기업인이 공권력까지 욕심을 냈으니 그 대가를 치뤘을 뿐이라는 논리. 그와 비슷하게 김대중도 과거에 사업가 출신이기도 했으며 사장까지 올라갔었지만 김대중은 정주영과 다르게 사업에서 물러나 정치계에 입문 후, 제 15대 대통령이 될 때까지 정치인으로서 생활을 오랫동안 했었기에 정주영의 또 다른 문제점은 정치인생의 경력도 있을 것이다. 정주영이 그나마 400만표를 득표할 수 있었던 것도 민자당 지지층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랍니다.

    3당 합당으로 김영삼계, 김종필계, 노태우계가 한 당이 되었는데 사실 이 세 세력은 전혀 다른 지지기반을 가진 별개의 세력이었다. 이전에 김종필계(신민주공화당), 노태우계(민주정의당)를 지지하던 국민들은 김영삼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다고 기존 통일민주당을 지지하던 국민들이 김영삼을 화끈하게 밀어준 것도 아니었답니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영남지역 통일민주당 지지층은 보전했지만 수도권 지역의 경우에는 민주당 비판적 지지론이나 신정치개혁당으로 지지기반이 흐트러졌고 김영삼의 지지세가 강한 강남 3구도 상당수가 제3당 지지로 흐트러졌다. 그들 중 상당수가 정주영에게 표를 던지는 외도를 하게 된다. 즉 김영삼도 싫고, 그렇다고 김대중을 찍기는 더 싫은 보수파가 대안으로 정주영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훗날의 안철수와도 매우 흡사한 부분이다. 덧붙여 이 와중에 박찬종은 거대 세력 앞에서도 100% 개인기만으로 6.4%라는 득표율을 얻어 선전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답니다.

    14대 대선이 끝난 뒤 선거운동을 도왔던 아들 고 정몽헌, 정몽준 회장과 함께 비자금 사건 때문에 수사를 받으며 모진 고초를 겪고 난 후 정치에 손을 떼었다. 대선 출마 이후로 대북사업으로 다시 활력을 얻기까지 현대그룹은 침체기에 빠져 안타까움을 샀다. 이 무렵 현대그룹이 겪은 정치 보복 일부만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답니다.

    김영삼 정부는 2년 동안 현대의 돈줄을 묶어놨는데, 오직 미국계 시티은행만이 현대에 대출을 계속해 주어 숨통을 틀 수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현대는 대출금이 적어서 대우와는 달리 IMF 때 타격이 별로 크지 않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 수도 있답니다.

    세무조사를 대선 1년 전인 1991년 말(1,300억 원 추징. 노한 왕회장이 "그 돈 뜯기느니 출마 한 번 하겠다"라 했다고 함)에 이어 2연타로 먹였다. 2번째 조사 때는 현대 직원들이 더 보여줄 거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말할 만큼 탈탈 털렸다고. 이런 조치들은 정권 내에서도 너무 과하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했으나, 당시 지지율 94%라는 기적을 이뤄내며 절정의 인기를 달리던 김영삼 정부의 기세였던지라 브레이크는 없었답니다.

    하지만 1995년 삼성 이건희 회장의 "기업은 2류...정치는 4류" 발언으로 반사이익을 얻게 된다("베이징 발언"). 세무조사에 대출제한으로 어려운 와중에도 삼성그룹을 제치고 재계 정상자리를 탈환한 것. 그리고 김영삼 정부의 보복에 격분한 정주영은 본격적으로 김대중을 후원하기 시작했고, 김영삼 정부가 IMF 사태로 휘청이는 와중 김대중이 대통령 당선에 성공해 정주영 역시 재기의 발걸음을 시작하게 된답니다.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되어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대북사업에 관심을 쏟았다. 1998년 6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북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일례로 프랑스의 철학자 기 소르망은 이 소떼 방북 이벤트를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며 감탄했답니다.

    이후 여러 번 더 방북하며 호화 유람선 금강, 봉래호를 이용한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켜 11월 18일 첫 출항하였다. 1999년에는 현대건설이 평양에서 체육관 건설 기공식을 가졌고 정주영 사후인 2003년에 완공한 뒤 류경정주영체육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이후 2000년 5월 건강을 이유로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편안하지 못했다. 바로 장성한 자녀들이 불화를 일으킨 거다. 이를 현대(기업)판 왕자의 난이라 부른다. 뉴스에도 나오고 한동안 시중의 화제거리까지 독점했을 정도로 매우 유명한 사건이랍니다.

    정주영은 몸소 병든 몸을 이끌고 자식들 간의 불화를 해소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죽기 직전에는 "3부자 동반퇴진"을 통해 이사회, 전문경영인 중심의 투명한 경영을 천명하였으나 그 직후 2001년 봄,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이때가 향년 85세. 그리고 현대가는 현대, 현대백화점,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으로 사분화 되었답니다.

    이는 세 아들 편에 각각 줄을 섰던 여러 가신들의 농간이 크게 작용하였다. 차남이자 현대자동차를 이끌고 있는 정몽구는 이를 증오하여 선대의 가신들을 모두 가차없이 쳐냈고, 상당한 기간 동안 어떤 가신도 진심으로 믿지 않는 태도를 보여 일명 무원칙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매년 정주영을 기리며 그의 기일에는 생전에 머물던 종로구 청운동 자택에서 자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고, 최근에는 정몽구 회장의 한남동 자택에 모여서 지낸다.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학원 등에서도 추모식을 한다. 2015년에는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했는데, 기념식에서는 사실상 장남인 차남 정몽구가 가족대표 인사를 했답니다.

    - 정회장의 사망

    1999년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20살까지는 살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국내 일부 지방이나 시골마을에서 장수노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듯하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당시 84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건강이 어느 정도 양호한 편이었고, 120살까지 살게 되면 고향인 통천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외에 90세까지는 현역으로 뛰고 싶다고 한 적도 있답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극도로 건강이 나빠지고 쇠약해져 병원으로 통원 치료까지 한 적도 여럿 있었다가 결국 2001년 3월 21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작고함으로써 끝내 120살까지의 장수는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도 증손자까지는 봤답니다.

    

    - 여러 여담들

    사업을 시작하기 전의 꿈은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광수의 소설 '흙'[29]을 보고 자신도 변호사가 되어 억울함을 겪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다고 한다. 실제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응시, 2번 떨어졌다고 한답니다.

    어릴 때 가출을 4번이나 했는데, 첫 번째는 함경북도 청진으로 갔었다고 한다. 하지만 차비가 없어서 원산 근처의 고원군에 도착했다. 마침 그곳에 탄광촌 근처에서 철도 공사가 한창이어서 막노동을 했었다. 두 번째는 금강산이었으나 일도 못 구하고 사기만 당하고 아버지에 끌려왔다. 세 번째는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서 서울로 가서 부기학원에 등록했으나 또다시 끌려왔다. 네 번째는 소학교 친구 중에 부농의 아들이었던 오인보와 같이 가출했으나 또 끌려왔다. 이후 오인보는 나중에 '현대자동차공업사'의 창립멤버가 된답니다.

    대기업의 회장답지 않게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았던 구두쇠로 잘 알려져 있다. 흔히 일컬어지는 구멍난 양말 기워서 신고 다니는 부자가 바로 정주영이다. 젊은 시절에 서울에서 단칸방에 세를 들어 살 시절에 나무 장작 값을 아끼기 위해 하루 한 끼(저녁)만 더운 밥을 해먹었고 다음 날 아침밥은 전날에 지었던 찬밥을 그냥 먹었다고 한답니다.

    출근할 때는 전차 값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일터까지 걸어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평생 담배도 피우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배도 안 부른데 뭐하러 그 연기 뻑뻑 피워서 돈을 쓰느냐?"였다고. 배우 최불암도 그의 검소함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최불암이 정주영의 자택에 초청받아 갔을 때, 재벌집인데도 욕실 타일이 낡아서 깨져 있는 걸 그대로 쓰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 그가 이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될 줄은 몰랐답니다.

    다만, 건강에 관해서는 절대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아산의료원이라는 거대 병원설립도 있지만, 민간요법으로 산삼도 즐겨 먹었는데, 1980년 강원도 인제에서 600년은 넘은 130cm의 천연산삼이 나왔다는 말에 단숨에 달려와 거금 7,800만원[31]을 내고 그 산삼을 그 자리에서 전부 먹었다고 한답니다.

    한 때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퇴직금을 지급받던 것으로 유명했다. 2000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직을 퇴임하며 지급받은 것인데, 현대건설을 비롯하여 현대자동차, 현대상선,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등 총 24개 계열사에서 총 217억이 지급되었고, 이 중 현대건설에서 157억원을 지급했다. 하지만 이 기록은 21년뒤 자신의 아들인 정몽구에 의해 깨지게 된다. 정몽구 회장은 2021년 3월 현대자동차그룹의 등기 이사직에서 퇴직하면서 현대차그룹에서만 527억 3,800만원을 지급 받았다. 하술되어 있지만, 재벌 총수들은 퇴직금 지급을 거부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현대가의 경우에는 받을 것은 받겠다는 것이 정착되어 있는 듯하답니다.

    현대건설의 경우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창립연도인 47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한 것을 근거로, 퇴임 직전 3개월 평균 월급여에 연간 상여금을 12로 나눈 금액을 더한 뒤 총 근속 연수를 곱하는 방식으로 계산하고, 대표이사의 경우 근속연수에 4배를 곱해준다. 따라서 정주영 회장이 1947년 5월 창립 때부터 53년간 대표이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평균월급(상여금포함) 7,400만원에 가산 근속연수 212년(53x4)을 곱한 157억원의 퇴직금을 지급받았답니다.

    사실 재벌 총수들은 퇴직금의 지급을 거절하는 경우가 더 많다. 저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퇴직금의 지급은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의 자금사정에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퇴직금은 당시 산업은행으로부터 4,000여억 원을 지원받은 현대건설의 입장에선 더욱 부담되는 일이었고, 현대건설에선 내심 퇴직금 수령을 SKIP해 주시길 바랐으나 그런 거 없답니다.

    그리고 이 퇴직금은 이후 왕자의 난 당시 현대자동차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고있던 MH를 지원하기 위해 기타 계열사 주식을 처분한 자금과 함께 현대자동차 주식의 매입에 사용되었으나, 현대건설이 부도위기에 처하자 모두 처분한 후 현대건설의 회사채 매입에 쓰여졌고, 회사채와 기타지분을 매각한 자금이 출자전환과 유상증자에 투입되어 현대건설 주식으로 바뀌어졌다. 이 주식은 정주영 회장의 사망 당시 현대건설에 증여되었고, 감자되었다. 결국 돌고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답니다.

    대선 출마를 겸해서 낸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호사가들은 정 회장의 대선 출마는 완전 실패였다며 그의 자서전 제목을 따 '시련도 있고 실패도 있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은 PR을 겸해 여기저기 무차별적으로 무료 배포되기도 했다. 당시 뉴스에까지 나왔을 정도랍니다.

    스포츠를 상당히 좋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1988 서울 올림픽 때는 대한체육회 회장으로서 올림픽 유치에 사활을 걸었고, K리그와 민속씨름 출범 당시에는 현대 호랑이 축구단과 현대 코끼리 씨름단을 창단할 정도로 스포츠팀 운영에 관심이 많았다. 축구와 씨름 외에도 농구와 배구에도 관심이 많아 현대 남자 농구단과 현대 여자 농구단, 현대 여자 배구단에 엄청난 투자를 단행했다. 고려대 2학년 생이던 이충희를 정주영이 직접 점찍고 현대 농구단으로 스카우트한 것은 농구계에서 이미 유명한 일화. 다만, 야구에 대한 참여는 다소 늦었는데 인생 말년이던 1996년에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할 때 창단식에 찾아와 대형 기념구에 직접 싸인하기도 했답니다.

    무엇보다 정주영은 수많은 스포츠 종목들 중에서도 씨름을 매우 좋아했는데, 과거 현대건설 신입사원 연수 때는 직접 샅바를 잡고 모래판에서 씨름 경기를 뛰기도 했고 이만기가 초대 천하장사로 등극했던 1983년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때는 시작부터 끝까지 장충체육관 VIP석을 지키며 모든 경기를 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이만기가 경남대를 졸업하자 정주영이 직접 나서서 이만기를 스카웃했고 현대 코끼리 씨름단의 원년 멤버가 된다. 또 현대스리가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현대중공업 부서별 축구대회의 첫 대회 때는 등번호 1번을 달고 직접 경기를 뛸 정도로 축구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답니다.

    정주영의 이같은 스포츠 사랑은 자손에게 그대로 이어졌는데 차남 정몽구는 대한양궁협회 회장으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그 임무를 아들에게 넘겨줬고, 육남 정몽준은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거쳐 FIFA 부회장에까지 오를 정도로 세계 축구계의 거인으로 자리잡게 됐다. 또 오남 정몽헌과 칠남 정몽윤은 현대가에서 드물게 소문난 야빠였는데 정몽헌은 현대 유니콘스의 구단주로서 명문구단의 기틀을 닦았고 정몽윤은 한때 대한야구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직계는 아니지만 정주영의 조카인 정몽규는 현재 대한축구협회 회장이랍니다.

    MBC 드라마 '전원일기'와 최불암의 열혈팬이어서 드라마에 농부 역으로 출연할 뻔한 적도 있다. 또 최불암을 정치계에 입문시키기도 했다. 또한 최불암은 훗날 동사의 드라마 거부열전 - 정주영 편, 영웅시대 에서 정주영 회장(영웅시대에서는 작중 노년 천태산)역을 맡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최불암 문서로. 또 당시 방송에서 정주영의 흉내를 잘 하기로 유명했던 개그맨 최병서도 마음에 들어해서, 만날 때마다 용돈으로 거액을 건내줬다고 한답니다.

    노동조합을 무척 싫어하여 "노조 만들면 죄다 빨갱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도 한다. 이는 그가 사망 당시 몇몇 신문(한국일보 및 서울신문같은 중도적 신문 포함)으로 보도된 내용이다. 참고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도 노동조합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삼성그룹이나 계열사에는 별개의 노동조합이 없답니다.

    다만 노동조합에 대한 극단적인 적의가 꼭 정주영이나 이병철 개인의 특징은 아니고, 해당 시기의 기업인들 대부분이 '노조는 빨갱이들이나 만드는 것' 이라거나 '노조가 생기면 회사가 망한다'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랍니다.

    사실 현대(2010년대 이후)에도 노동관계법의 정비로 인하여 사측이 노조 결성을 원천적으로 저지하거나 와해시킬 수 없게 된 것 뿐이지 기업인 및 친기업 입장의 언론 등에서는 여전히 노조에 대한 극단적인 적의를 보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전 대통령같은 경우도 서울특별시장 재직 당시 청계천 재개발 사업 당시 주변 상인들의 항의집회에 대해 '저게 지역상인들이냐? 노조 데모꾼이냐?' 식의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즉, 해당 시기 기업인 출신들에게 있어 '노조=빨*이 시위꾼=악'의 등식은 별로 특이할 것 없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여겨졌다는 것이랍니다.

    이 측면에서 보면 흔히 라이벌로 여겨지는 이병철의 삼성그룹이 이건희로의 승계가 이뤄진 이후인 2010년대까지도(비판과 불법이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무노조경영을 관철해온 데 비해 정주영의 현대그룹의 경우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사이 전투적 노동운동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여겨지는 현대차 노조 등 범 현대 계열사 노조들이 (정당과의 연계를 통한 정치 참여 및 사회적 문제 전반에 대한 참여를 상대적으로 중시하는) 민주노총과 결별하고 조합원의 처우 개선을 중심으로 하는 노선을 채택하는 등 급격한 온건화-보수화 경향을 보이게 된 2000년대 이후의 상황에서는 쉽게 연상하기 어렵지만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사이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 결성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현대 계열 노조들은 급진적-전투적 노동운동의 중심에 있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대표적인 강경파였답니다.

    현대중공업 노조가 탄생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오히려 당시 기업가 중에서는 노조 결성 운동을 강하게 탄압하여 억누르는 데 실패한 축에 속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80말~90초의 노동운동 관련 자료나 유인물에서 제일 많이 까이는건 대우그룹의 김우중이고, 삼성의 이병철은 무노조 경영 원칙 때문에 도리어 의외로 덜 까인데 비해(즉, 이병철을 까줘야 할 삼성 내의 노조 조직 운동가들이 세력이 너무 작았다.) 정주영은 일단 까임의 우선순위 자체가 낮았음을 알 수 있답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1980년대 초 한국 경제 동향을 분석하면서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비판적인 인사로 분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게 당장 정주영의 정치 입문 계기가 독재정권의 뇌물 강요 및 반강제 정책 참여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시기 기업가들은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을 좋게 보고 싶어도 좋게 볼 수는 없었답니다.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이병철나 신격호 등과는 달리 재벌이면서 정계진출을 한 인물이며 실제로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인 생활을 했다. 정당은 통일국민당이며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하지만 야심차게 출마했던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양대산맥을 넘지 못하고 낙선하고 말았다. 그의 생전 두 가지 사업이 바로 재벌과 정치인인데 재벌 분야는 정몽구에게 물려줬으며 정치인 분야는 정몽준에게 물려줬다. 정몽준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정당인 통일국민당으로 출마했지만 그 통일국민당이 정당해산을 한 이후에는 무소속으로 있다가 보수계열인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바꿔서 7선 의원까지 역임했다. 그러나 2014년에 치뤄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낙선하면서 정계를 떠났답니다.

    통천군 출신 동향 박용학 전 대농 창업주와도 절친이었다. 재계에는 이른바 '정주영 병'이란 용어가 있다. 정주영의 방식, 특히 '안 되면 되게 하라.', '임자, 해봤어?'가 상징하는 정주영 특유의 모험주의, 군대식 조직 문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려는 방식이 성공의 방식이라고 착각하고 무리하게 경영을 하다가 실패하는 유형을 말한답니다.

    - 인간성 및 여러 일화

    어린 시절부터 성격이 무척 급했다. 소학교를 다니던 시절 하교할 때 신발을 신는 시간이 아까워 발에 걸친 채로 뛰어나가기 일쑤였답니다.

    집을 떠나 서울로 가는 길에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삯이 없었다. 망설였지만 배가 있는데 타지 않는 것이 바보같아 돈도 없이 타버렸다. 목적지에 다다라 돈이 없는 것을 안 사공에게 따귀를 얻어맞았지만 오히려 배짱이 커졌다고 말했다. 일화에 따라서는 뱃사공이 따귀를 때리고 '후회되지?'라고 묻자 정주영은 '예. 후회되네요. 따귀로 배삯을 치를 수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에 탈 걸 그랬어요.'라고 받아쳤다고 한답니다.

    농부가 되기 싫어 집을 뛰쳐나온 그를 아버지가 데리러 왔다. 결국 아버지에게 설득당해 귀향하기 전, 서울 구경이나 하자며 창경원을 갔다. 입장료가 아까웠던 그의 아버지는 "나는 시골에서 호랑이 많이 봤어. 너 혼자 다녀와." 이랬다고. 심통이 난 정주영은 "아버지가 안 가면 저도 안 가요!"라고 버티면서 결국 부자(父子)는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창경원 동물원 구경을 했답니다.

    쌀가게에서 일하기 전에는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일을 하였다. 합숙소에서 인부들과 함께 잠을 청하는데 빈대가 들끓었다. 빈대를 피하고자 긴 탁자를 가져다 놓고 그위에서 잠을 자는데 탁자 다리를 타고 올라와 피를 빨았다. 그래서 이번엔 냄비에 물을 떠다 탁자 다리를 담그고 잠을 청했다. 그랬더니 빈대는 포기하지 않고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점프하는 수법으로 피를 빨려고 들었다. 빈대에게서 끈기를 배웠다. 이 때문에 그룹 임원 중 일처리가 미숙하거나 근성 없는 업무 태도를 보이는 사람에게 "에라이 빈대만도 못한 녀석아!"라고 구박을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답니다.

    아직 해방되기 전 정주영이 자동차 정비소인 아도서비스를 운영할 때였다. 한 직공의 사소한 실수로 공장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면서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정주영은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잃었다.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와 공장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본 정주영은 탄식했지만 곧 맘을 가다듬고 직원들에게 "야 괜찮아! 어차피 건물이 낡아서 헐어버릴려고 했으니 철거비 굳은 셈이지. 자, 기운차리고 그 돈으로 막걸리 파티나 하자고." 말했다고 한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의 일이다. 좁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박정희와 독대하던 때였다. 당시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일하느라 너무나도 피곤했던 정주영은 박정희가 말하고 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몇 분 후 화들짝 깨어나 박정희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너무나도 부끄럽고 두려웠다. 하지만 박정희는 정주영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정사장, 피곤한데 내가 너무 미안하오" 그 이후 자신도 현장을 둘러보다가 졸고 있는 직원을 보면 왜 졸고있냐 라는 책망대신 "피곤하지? 미안하네" 라며 격려를 했다고 한답니다.

    포드와 합작해 자동차를 만들려던 때의 일이다. 한국에 온 포드쪽 사람들과 포드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차가 고장이 났다. 포드쪽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차니 자신들이 고치겠다고 했으나 고장난 원인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정주영이 공구 등을 꺼내더니 순식간에 고쳤다고 한다. 포드쪽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정주영은 자신이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할 때 포드차도 고쳤다고 말했다. 이것은 현대가 포드와 합작에 성공하는데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현대에서 시멘트를 생산할때 직원들이 정주영 회장의 별명인 호랑이를 상표로 하였다. 그래서 현대 시멘트(현 한일현대시멘트)가 호랑이표 시멘트로 불리며 시멘트 포장지에 호랑이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대재벌이었지만 소탈하고 전통적인 방식의 생활을 고수해 현대 오너가의 아침은 매일 오전 6시에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전부 다 둘러앉아 아침식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주로 나온 메뉴는 미역국이었는데, 그 미역국은 왕회장의 부인 변 여사를 비롯한 현대가 며느리들이 새벽부터 준비한 것이랍니다.

    소탈함은 그의 일생 곳곳에도 드러나고 지금도 남아있다. 집무실 소파는 너무 오래돼서 시트가 많이 해졌고, 청운동 저택은 페인트 칠이 떨어져도 새로 칠을 안해서 그 자국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도둑들이 정주영의 자택을 노리고 들어와 한탕 벌어먹으려고 몰래 침입했는데, 재벌집인데도 털어갈 물건이 없었다며 불평불만을 하고 조용히 떠나가기도 했답니다.

    게다가, 그들과 변중석 여사가 마주쳤는데 도둑들이 돈 되는 걸 내놓으라고 하자 건네준 게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정몽준의 아내를 위해 준비한 예물뿐이었다고 한다. 또한, 현대그룹 사옥 특유의 아치형 디자인도 정주영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디자인이었는데, 이렇게 지은 계동 사옥이 삼성 본관 건설비의 3분의 1밖에 안 들어서 그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강했다고 한답니다.

    살아생전의 장래희망이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서 실제로 국회의원도 해봤지만 끝내 대통령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여섯번째 아들인 정몽준이 정주영이 살아생전 이루지 못한 대통령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정치인이 되었답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신문들을 읽거나 해외에서 날아온 문서들을 검토하는 등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이었다. 이건 쌀가게에 근무할 때 전차 삯이 부족하여 꼭두새벽에 일찍 출근한 것에서 시작된 것. 위에 서술된 미포조선소 건설현장 순시 중 바닷물에 추락한 날도 어김없이 새벽 3시에 일어났다고 한답니다.

    앞서 서술한 아침식사 루틴이 있는 것처럼 유독 아침식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인물이다. 본인이 농부의 아들이었고 상당한 체력과 노동력을 요하는 건설회사를 운영했던 경영자였기에 하루종일 일을 하려면 아침을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배경 때문에 범현대가 기업들의 구내식당은 아침식사도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아울러 다른 기업에 비해 식대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먹어야 일을 한다"는 창업주의 유지가 이어지고 있는 셈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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