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거스 히딩크 여자친구 엘리자베스 감독 나이 한국 부인 아내 결혼
    카테고리 없음 2022. 8. 27. 11:10

    

    - 프로필 이력 경력

    이름 본명
    거스 히딩크
    Guus Hiddink

    출생 나이
    1946년 11월 8일 (75세) 
    고향 출생지
    네덜란드 헬데를란트주

    국적
    네덜란드
    신체 키
    182cm

    직업
    축구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더 흐라프스합 (1967~1970)
    PSV 에인트호번 (1970~1972)
    더 흐라프스합 (1972~1977)
    NEC 네이메헌 (1977~1981)
    → 워싱턴 디플로매츠 (1978 / 임대)
    → 산호세 어스퀘이크스 (1980 / 임대)
    더 흐라프스합 (1981~1982)

    감독
    더 흐라프스합 (1982~1984 / 수석코치)
    PSV 에인트호번 (1984~1987 / 수석코치)
    PSV 에인트호번 (1987~1990)
    페네르바흐체 SK (1990~1991)
    발렌시아 CF (1991~1993)
    발렌시아 CF (1994)
    네덜란드 대표팀 (1995~1998)
    레알 마드리드 CF (1998~1999)

    레알 베티스 (2000)
    대한민국 대표팀 (2001~2002)
    PSV 에인트호번 (2002~2006)
    호주 대표팀 (2005~2006)
    러시아 대표팀 (2006~2010)
    첼시 FC (2009)[9]
    튀르키예 대표팀 (2010~2011)
    안지 마하치칼라 (2012~2013)
    네덜란드 대표팀 (2014~2015)
    첼시 FC (2015~2016)[11]
    중국 U-21 대표팀 (2018~2019)
    퀴라소 대표팀 (2020~2021)

    기타
    PSV 에인트호번 (2019~ / 기술고문)

    네덜란드의 전 축구감독.

    선수 시절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감독으로서는 클럽과 국가대표팀 양쪽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주요 국가대표팀 감독 성과로는 네덜란드의 1998 프랑스 월드컵 4위, 대한민국의 2002 한일 월드컵 4위[14], 호주의 2006 독일 월드컵 16강, 러시아의 유로 2008 4강 등이 있으며, 클럽 감독 성과로는 PSV 에인트호번의 1987-88 시즌 트레블과 6회의 에레디비시 우승 및 첼시의 FA컵 우승 등이 있다.


    2021년 9월 10일, 공식적으로 감독직에서 은퇴를 발표함으로써 감독 생활을 마쳤다.

    - 2022년 8월 경에 히딩크의 근황은???

    '월드컵 4강 신화'를 지휘했던 거스 히딩크(76·네덜란드)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다음 달 호주 대표팀의 2022 카타르 월드컵 준비에 힘을 보탠다.

    호주축구협회는 22일 "전설적인 네덜란드인이자 전 호주 축구대표팀 감독인 히딩크가 사커루(호주 남자 축구대표팀 애칭)의 카타르 월드컵 출정 경기 및 A매치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다음 달 호주로 돌아온다"고 알렸다.

    이어 "히딩크 전 감독은 호주축구협회와 그레이엄 아널드 호주 대표팀 감독으로부터 9월 22일 뉴질랜드와의 친선경기에 초청됐다"고 덧붙였다.

    카타르 월드컵 본선에서 프랑스, 덴마크, 튀니지와 D조에 속한 호주는 9월 22일 호주 브리즈번의 선콥 스타디움에서, 그리고 사흘 뒤인 9월 25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이든 파크에서 뉴질랜드와 두 차례 평가전을 벌인다.

    호주축구협회는 특히 카타르 월드컵 개막 이전 대표팀이 자국에서 치르는 마지막 경기가 될 9월 22일 뉴질랜드전을 월드컵 출정식을 겸해 치를 예정이다.

    아울러 자국 대표팀이 1922년 6월 뉴질랜드 더니든에서 뉴질랜드와 사상 첫 A매치를 치른 이후 올해로 1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는 행사도 함께 가질 계획이다.

    한국 대표팀 사령탑으로 2002 한일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썼던 히딩크 전 감독은 2005∼2006년에는 호주 대표팀을 맡아 호주를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올려놓았다. 이어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호주 역사상 최고 성적인 16강 진출까지 이뤄내 호주에서도 영웅 대접을 받는다.

    현재 호주 대표팀을 이끄는 아널드 감독은 당시 대표팀 코치로 히딩크 감독을 보좌한 바 있답니다.

    아널드 감독은 "히딩크 감독이 중요한 경기를 위해 호주로 돌아와달라는 우리의 초청을 수락해 기쁘다"면서 "우리나라의 스포츠에 막대한 공헌을 한 사람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히딩크 감독의 캠프 합류가 오는 11월 발표될 월드컵 최종엔트리에 들기 위해 경쟁하는 선수들에게는 영감을 줄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히딩크 감독은 훌륭한 스토리 텔러이므로 현세대의 호주 선수들에게 그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기대된다. 많은 우리 선수가 그의 업적을 알지만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면서 "이것은 또한 축구 팬들이 2005년과 2006년에 호주 축구를 위해 일한 히딩크 감독에게 감사 인사를 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히딩크 전 감독도 호주축구협회를 통해 "아주 멋진 시간이었다"고 호주 대표팀 사령탑 시절을 돌아본 뒤 "호주에 가는 것이 매우 기쁘다. 사람들과 내 경력을 이야기할 때마다 항상 사커루와의 경험을 강조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호주 대표팀 감독 재임 기간에 대해서는 "내 경력에서 많은 에너지를 준, 한 챕터다"라고도 했답니다.

    - 히딩크의 개인사항

    - 이름
    네덜란드어의 g의 발음은 /x/[17]으로 한국어로 표기하면 후스 또는 휘스 히딩크가 좀더 가까우며, 2005년 제정된 네덜란드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휘스 히딩크로 표기된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부임하기 이전 국내 언론에서는 주로 '후스' 히딩크로 표기하였으나, (좀더 쉬운 영어식 발음인) '거스'라고 불러 달라는 본인의 요청이 있은 이후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영어식 발음인 '거스' 히딩크라 표기한다.

    한국에선 부진할 때 '오대영'이라 불리다가, 4강까지 진출한 뒤 '구국의 명장 희동구'라고 칭송받았다. 참고로 중화권에서는 후이딩커(暉定克)이라고 표기했답니다.

    - 가족관계

    히딩크의 가문은 고향인 파셰펠트에서 수백년간 뿌리를 내린 명성이 있는 집안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 게트 히딩크는 2차 대전 당시 겉으론 시청 공무원직을 수행하며 암암리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는데,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진 않았지만 유대인들을 숨겨주거나 배식표를 빼돌려 그들의 끼니를 해결해 주었고, 독일군이 배급하는 식량을 빼돌려 레지스탕스의 군량을 조달했으며, 적지에 떨어진 미군 조종사들을 중립국으로 피신시키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장을 전달받았답니다.

    6명의 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난 히딩크는 어린 시절 개구쟁이로 학교 수업을 자주 땡땡이를 치곤 했다고 한다. 사냥을 좋아하는 외할아버지가 부추겼다고 하는데, 덕분에 외할아버지로부터 모험심이나 결단력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아예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입수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19] 아무튼 이런 개구쟁이가 공차는 걸 좋아해서 결국 축구선수가 되었다니다

    - 여자친구

    히딩크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2002년 월드컵 당시나 지금이나 알려진게 많지 않다. 일단은 1살 연하의 이니 히딩크와 결혼하여 1969년과 1972년에 각각 미셸 히딩크와 마크 히딩크가 태어났지만, 부인 이니와는 이미 2002 월드컵 이전부터 별거 상태였고 20살 연하의 엘리자베스 피나스와 계속 교제 중이며 2022년 2002 월드컵 20주년 기념 행사에도 히딩크와 같이 방한했다. 그녀는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수리남 출신으로, 독일 자동차 브랜드 오펠에서 근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답니다.


    이처럼 부인과 이혼하지 않고 별거 중인 상태에서 애인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다니는게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유럽에서는 그냥 단순한 사생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지만, 유교적 문화가 여전히 지배적인 한국에서는 영 좋지 않은 시각이 강했던 탓에 히딩크호 출범 초기부터 기자들이 집요하게 정보를 캐내려 했다.

    물론 서유럽을 비롯한 서양쪽 문화는 사생활에 대해 굳이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결례인데다 히딩크 본인의 성격부터가 불같기로 유명했던지라 엘리자베스와의 관계를 두고 집요하게 질문을 날린 기자들을 향해 "머리통을 발로 차 버리고 싶다"며 불쾌한 감정을 보이기도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프랑스와의 컨페더레이션스컵 8강 본선 조별리그 경기와 유럽 전지 훈련에서 체코와의 평가전에서 5-0 으로 참패하는 등 2001년 내내 성적 부진 문제가 제기된 와중이었던지라, 엘리자베스를 자주 만나는 것을 두고 리더쉽 문제라는 언론의 문제 제기도 있었답니다.

    하지만 커리어 우먼답게 진중한 성격의 엘리자베스가 히딩크의 불같은 성격을 통제하면서 차츰 히딩크가 언론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졌고, 2001년 말에는 휴가를 추가로 다녀오는 문제로 이용수 당시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과 히딩크 감독이 언쟁을 벌이며 그만두네 마네 등의 험악한 말까지 오가자 엘리자베스가 히딩크를 진정시킨 뒤 이용수 기술위원장이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을 설득해서 히딩크가 연말 휴가를 다녀올 수 있게 되는 등의 여러 활약을 해냈다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에도 관심이 있었던터라, 히딩크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개인적으로 장애인 등의 소외 계층을 지원하는 단체를 찾았고 나중에 히딩크에게 한국에서 자선 활동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 탄생한게 바로 히딩크 재단이다. 히딩크의 인터뷰 히딩크가 현재까지도 한국에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여러 애정을 표시하고 히딩크 재단 활동도 계속되는 것을 보면, 그만큼 엘리자베스가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 선수 경력

    히딩크는 처음부터 프로선수가 되고자 다른 선수들처럼 유스팀에 입단해서 프로선수가 된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 스포츠 전문대학(CIOS)에 입학하여 지도자를 목표로 했다고 한다. CIOS 졸업 후 2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 더 흐라프스합의 코치로 부임했지만 나이도 스물이고 기량도 괜찮았기 때문에 감독이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해 곧바로 수락했다고 한다.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랍니다.

    1960년대 당시, 네덜란드 에레디비시는 AFC 아약스나 PSV 에인트호번같은 강팀을 제외하곤 급료도 부족한 편이어서 선수들 대부분이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훈련하는 투잡을 뛰었다고 하는데 히딩크는 코치직을 겸임하고 있었으므로, 오전에 유소년을 지도하고 오후에 팀 훈련에 참가했다고 한다. 더불어 야간에 체육 전문대학에 입학하여, 체육교사 준비도 같이 했다고. 3시즌 동안 데 그랴프샤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PSV로 이적하였는데 주전 경쟁이 심하여 제대로 출전하지도 못했다. 다시 데 그랴프샤프로 이적했고, 후에 나이메이건으로 이적했다.

    나이메이건 시절에는 체육교사와 선수를 겸임했는데 특수학교에서 장애아들을 지도하면서 얻은 경험[24]이 훗날 감독 생활을 할 때 많은 도움[25]이 됐다고 한다. 나이메이건 시절에는 시즌 종료 후 즉, 5월부터 다음 시즌이 시작되는 9월 즈음까지 미국에 잠시 임대되어 미국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당시 룸메이트가 조지 베스트였다고. 나이메이건에서 은퇴 후 다시 더 흐라프스합로 돌아와 코치 생활을 시작했지만 선수가 부족한 탓에 감독의 부탁으로 1시즌 더 선수생활을 하게 됐다. 포지션은 리베로. 하지만 1981/82 시즌을 끝으로 완전하게 은퇴한답니다.

    - 논란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 한국에서 벌어들인 광고 수입과 인세를 실제보다 적게 신고했다는 혐의와 월드컵 직후 조세 피난처로 알려진 벨기에 아셀에 집을 얻은 뒤 거주지 허위 신고를 해 17억 가량의 세금을 탈루한 혐의로 인해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이던 2006년 7월 탈세 혐의로 네덜란드 검찰에 의해 법정에 기소되었다. 이후 2007년 1월과 2월 각각 1, 2차 공판에 나서 본인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6개월 집행유예와 벌금 45,000유로(약 5,500만원)를 선고받았다.


    히딩크 입장에서는 그나마 실형을 모면한 것이 다행스러운 점이라는 입장이었으나, 이로 인해 그동안 국제 축구계에서 쌓아온 명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히딩크의 커리어에 있어서 상당한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이후 히딩크는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과 첼시 FC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부정적인 시선들을 어느 정도 거두는 데 성공했으나, 히딩크에 대한 비판이 나올 때마다 끊임없이 거론되는 사례로 남게 되었답니다.

    - 대한민국 내의 위상과 평가 알아보기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성과인 FIFA 월드컵 4강 신화 덕분에 한국내에서 그의 인기는 넘사벽으로 아직까지도 한국 축구계, 아니 어쩌면 한국의 모든 스포츠 감독을 통틀어 최고로 인기있는 감독.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레전드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 중 유일한 외국인 레전드이며 KFA 명예의 전당 최초의 7인 중 1인이다. 명실상부한 국민 감독으로서의 입지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탄탄하며 그 어떤 축구 감독보다도 훨씬 인기가 좋다. 개개인마다 각자 좋아하는 감독이 있거나, 젊은 세대일수록 히딩크의 성과를 덜 체감한다. 그러나 남녀노소 모든 한국인에게 이름을 각인시킨 감독은 히딩크 뿐이다. 한국에서 타 감독과의 선호도 비교는 논외수준의 성역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랍니다.

    

    그에 대한 한국 축구팬들의 애정과 그리움은 아직까지도 식을 줄 모르고 있을 정도로 그의 한국 내 입지는 그야말로 언터쳐블이라 해도 무방하다. 심지어 2002 월드컵 이후 4번의 월드컵이 지나간 후인 2018년 겨울에는 조용하게 한국을 방문하여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으나 가는 곳마다 반가워하는 한국인들이 사진 촬영을 요청해서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을 정도. 당시 동행했던 네덜란드 TV 방송분을 보면 히딩크 본인도 "(2002 월드컵 이후) 2년쯤 지나면 잊혀질거라 생각했지만 한국에 올 때마다 사람들이 많이 다가온다."는 말을 하며 빠르게 사진 요청에 응한다.

    이렇듯 한국에서 사실상 영원한 영웅 대접을 받는데 대한 반작용인지 일본에서는 히딩크 감독의 안티가 많다. 게다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박살냈으니, 싫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가 탈세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자 2ch 등지에선 축제 분위기였다가 오래가지 않아 풀려나자 도로 실망했던 적도 있다.

    물론 위에도 서술했듯이, 처음부터 이런 평가를 받은건 아니었고 한국에서도 처음에는 그의 별명이 '오대영'이었을 정도로, '외국인 감독 하나가 굴러들어와선 개최국 망신 다 시키겠다'고 어마어마한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월드컵에서 우리는 분명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모든 것은 그 때에 알게 될 것이다.라며 준비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어떠한 비판도 수용할 것이라 하여 더더욱 언론을 벙찌게 만들었다. 거기다 언론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비판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도 자신은 6월을 기다려 왔고 세계 유명 축구팀들이 비웃어도 반박할 필요 없이 월드컵에서 보여주면 된다며 무한한 자신감을 표출했다.


    특히 "개최국으로서 2라운드 16강만 넘으면 체면치레 하는거다."라며 대부분의 여론이 히딩크에게 16강 진출을 두고두고 강조할 때도 "한국 국민들이 원하는 16강은 나의 바람이 아니다. 내게는 그 이상의 바람이 있다."며 야망을 드러내었다. 당시엔 '32강 본선 조별리그나 통과하고 그런 말을 해라'는 반응이 많았지만 정말로 16강을 통과하고, 이후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라는 초절정 명언과 그에 걸맞는 성적까지 겹쳐지자 꿈을 현실로 만든 남자라면서 한국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등극했답니다.

    감독으로서 히딩크가 평가한 한국 축구의 문제점은 공격수는 많으나 수비수의 자원이 부족한 것, 그리고 정신력이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이 부분은 2010년대의 한국 축구에도 어느 정도 들어맞는 편이다. 훈련 중에도 전술적, 기술적 실수는 문제 삼지 않았으나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선수가 가장 싫다며 선수들의 정신력에 많은 비판과 조율을 요구했다.

    한국 선수들이 기술은 유럽보다 딸리지만 붉은 전사 투혼만은 살아있다라고 생각했던 세간의 평가와는 정반대되던 셈. 그는 한국 축구의 기술이 유럽에 비교해서도 훌륭한 수준이라고 평가했으며 특히 양발잡이들이 많다는 점을 놀라워 했다고 한다.[3]

    유럽 축구에 대해 무지했던 당시에는 언론플레이성 발언이라는 의견도 있었고 확실히 EPL 라리가 세리에등 최상위 리그들에는 비비기 힘들었으나 주전급 선수들은 유럽 중상위권 리그에서는 통용 되는 실력을 보이며 이를 증명하였답니다.

    2002WC 멤버들의 90분 내내 사냥개처럼 뛰어다니던 체력과 탄탄한 기본기들만 보던 축구팬들은 이들이 은퇴 한 이후 국가대표에 뽑히고도 체력[5], 기술적으로 문제를 보이는 선수들이 속출하며 히딩크의 저런 발언들이 립서비스처럼 보이게 만든 원흉이 되었다. 히딩크는 상술 했듯 오히려 멘탈적인 면을 크게 지적하며 한국 선수들의 승리에 대한 의지는 제법 높게 평가했지만 그마저도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보여주는 그 무시무시한 승부 근성에 비교해보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특히 히딩크가 가장 혹평했던 것은 한국 선수들이 공만 잡으면 지나치게 흥분하여 오히려 골 결정력에 방해가 되는 것과 어린 선수들이 고참 선수들을 무서워 해 기가 눌려있다는 것이었답니다.

    이러한 한국 특유의 선후배간 위계질서를 가장 좋지 않게 보면서 "그라운드에서는 반드시 나이를 막론하고 반말을 쓰고 위계질서에 관계없이 서로간에 대화를 하며 경기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며 모든 선수들이 훈련 중 반말을 쓰게 하고 존댓말을 쓰는 사람은 월드컵 안 데려가겠다고 으름장을 놨다고 한다.

    히딩크는 이런 수직적 관계가 축구의 창의성을 말살한다고 보았고 선배가 잘못을 하면 후배라도 반드시 지적하고 수정하라는 철학을 강조했다. 당시 몇몇 고참 선수들은 한국의 유교적 정서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고 혹평했으나[10] 지금에 와서는 대부분의 경우 대표팀과 축구계에 존재하는 위계질서나 권위의식을 타파하기 위한 신선한 시도였고, 결과적으로 20대 초반의 이천수, 박지성 등의 선수들이 기죽지 않고 활약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더불어 수비수 자원의 부족 및 유소년 발굴 시스템의 안일함 등 제 3자인 외국인 감독의 시각에서 한국 축구 및 국가 대표팀의 문제점에 대해 냉철하게 분석, 지적했다는 점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 외에도 기존에 주목받지 못하던 선수들을 기용 및 발굴해 호평을 받았는데, 미리 선발된 선수 외에 선발되지 못한 쪽에도 더 좋은 선수가 많을테니 잔뜩 추천하고 계속 뒤져보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답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잘 나가던 선수들보다 한국에 오래 머물고 있어 경기력이 다듬어져 있던 국내 선수들의 체력 등을 더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이 당시에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스타 선수였던 이동국은 탈락한 반면에 신참에다 당시 아무런 기대도 받지 못하던 박지성이 최종 엔트리에 합류하여 한일월드컵의 또 다른 스타가 된다. 박지성 본인에겐 히딩크가 축구인생의 은인이었던 셈이랍니다

    아무튼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히딩크는 내리막길 감독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났고 대한민국 내에선 국민영웅 대접을 받았다. 월드컵 시작하기 전에 오대영 감독이라고 그렇게 까대던 국내 언론들도 그를 거의 한국 축구의 성자로 떠받들며 매일 같이 찬양 일색이었다. 혹자는 만약 독일을 이기고 결승에 진출하거나 우승까지 했다면 국내에 히딩크를 숭배하는 종교가 하나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하기도 했다.

    2002 한일 월드컵은 홍명보 등 고참들이 안정적인 기량을 보이고 이영표, 박지성 등 히딩크 부임 이전 발탁된 신예들의 활약도 돋보여 4강 진출이란 성과를 이룩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리즈 시절이었다. 동시에 히딩크 본인에게도 전성기이자 인생역전 그 자체였다 할수 있답니다.

    이런 4강 신화의 업적을 인정받아, 히딩크 감독은 2003년 2월 25일 취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 문화 체육 학술 인사로 초청받아 참석하기도 했다.

    - 한국에 대한 애정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나서 인생역전을 이루어낸 만큼 한국에 대해선 당연히 애정어린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월드컵 이후 PSV 에인트호번 감독으로 떠나기 전 인터뷰에서 한국과 정이 많이 들어 떠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이 참가할 큰 대회도 당분간 열리지 않을 것 같고 여기서 서로 헤어지는게 좋은 이별이 될 것 같다고 말하였다. 2012년 방한 후 기자회견장에서 수많은 기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자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월드컵 전 2002년 5월에 한 인터뷰 역시도 화제가 됐는데, 단순히 이번 월드컵 무대만을 위해 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한국축구가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춘 강력한 팀으로 가는 길에 작은 기여를 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또한 한국 선수들의 첫인상에 대해선 착하고 순수하며 의지가 강해 그들을 매우 사랑한다고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답니다.

    더불어 "과거의 한국축구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변방의 소속팀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속한 나라이며 내가 이끌고 있는 우리의 나라이다. 비록 국적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그 문화의 차이가 다르지만 내가 선택한 나라, 또한 가능성이 있는 나라이다. 남들이 뭐라 떠들든 나는 내가 생각한 길을 갈 것이며 궁극적으로 이는 성공으로 이어질 것으로 확신한다."며 비난여론에 대응하고 감독으로서 책임감을 드러냈다.


    이렇듯 히딩크는 대한민국에 대해 유독 각별한 애정을 표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단순한 립 서비스라고 볼 수 없다. 대한민국 대표팀을 맡지 않았더라면 자기 자신도 자칫 한물간 3류 감독 신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각종 상금과 CF[18] 출연료 등으로 거액의 돈까지 벌어들인데다 한국에서는 "한국 축구의 은인"이라며 감독 인생 동안 받아본 적이 없을 만큼의 영웅 대접을 다 받았으니 대한민국 활동을 통해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고 할 수 있다. 히딩크 본인도 이때가 자신의 Career high였다며 그리워하는 발언을 후에 남기기도 했고 특히 인천국제공항에 존재하는 외국 국가원수 전용 비밀 출입문인 더블 게이트를 이용하는 국가 원수급 대접을 받아본 인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생각보다 한국에서의 위상은 훨씬 더 대단하답니다.

    심지어 그를 한국으로 귀화시켜 '희동구'라는 한국 이름을 주고 상암 희씨의 시조로 삼자는 애정어린 농담까지 돌아다녔을 정도. 여권을 빼앗아서 출국을 막아야 한다는 드립도 바로 이 때 나왔다. 월드컵 직전에 돌아다녔던 유머 중에는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시, 8강 진출시... 등으로 국민 반응을 예측한 것이 있었다. 해당 유머에 따르면 8강 진출시 정몽준 당시 축구협회장과 히딩크 감독이 원내 1위 정당을 설립, 4강 진출시 헌법개정으로 히딩크 감독 대통령 취임 등등. 동아일보 기사...어? 물론 이는 그 빛나는 성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찌됐든간에 성과가 나왔기에 이 정도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실제로 2002년 7월 명예국민 지위가 수여되었답니다.

    만화가 허영만이 관상을 소재로 한 만화 꼴에서 히딩크를 다루며, 수재민 연금으로 겨우 5천만 원(!?)을 냈다고 비판한 관상가 인터뷰를 실은적이 있다. 사실, 네덜란드 사람들은 1945년 전후 2차례의 불경기를 겪으며 근검절약이 몸에 배었다. 히딩크가 그 정도 액수를 '쾌척'한 것이 대단한 것이다. 게다가 2010년대 들어 5천만 원은 살짝 적어보이지만 IMF 구조조정 사태 터지고 얼마 안 지난 상황에서 당시 5천만 원이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사실 자발적으로 하는 기부에 "한국에서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는데 적어도 얼마 이상은 내야 한다"라는 기준을 부여하는 것도 우습긴 하다. 하지만 조세 피난처를 이용해 탈세한 혐의가 인정돼 유죄판정을 받은 만큼 진퉁 짠돌이라 할 수 있답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 2002 월드컵 10주년 기념 올스타전에 초청되었을 때도 "한국 사람을 세계 곳곳에서 만날 때마다 언제나 환영받는 느낌이 떠오른다."며 "한국에 그동안 여러 번 와서 2번째 고향 같다."라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답니다.

    이후 올스타전 경기에서 박지성이 골을 넣고 포르투갈 전에서 보여준 그 유명한 세레머니 포즈를 취하며 달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어퍼컷 모션을 취하며 포옹, 10년 전의 명장면을 재현하여 많은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답니다.

    한국 축구선수들 및 인사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평이 대부분이고 이 월드컵으로 스타가 된 한국 선수들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아직까지도 교류가 활발하다. 이 당시 거미손 골키퍼로 이름을 떨친 이운재가 힐링캠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2년 전부터는 홍명보, 박지성, 안정환, 이운재 등과 함께 2002 월드컵 계모임을 시작해 얼굴을 보고 있다고 한다. 회장은 홍명보. 홍명보가 자신의 팀으로 와 지도자 연수를 받을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이영표, 박지성의 경우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팀으로 데려가 해외 진출의 발판을 마련해주고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덕분에 이영표와 박지성은 성공적인 해외 리그 커리어를 쌓는 데 성공했고 박지성은 한국 축구 최고의 레전드로 성장하게 되었다.

    선수들의 히딩크에 대한 인상은 호랑이처럼 엄하지만 할아버지처럼 푸근했다고 한다. 특히 선수들에게 주눅들지 말라며 자신감을 심어준 것과 끝까지 믿어준 것에 감사한다는 평이 많은 등, 정신적인 면에서 선수들을 지탱해 준 것에 대한 감사도 많이 받았다. 심지어 월드컵에 출전도 못해보고 2002년 당시 벤치 신세를 지켰던 선수인 윤정환도 당시에는 벤치 신세로 만들어 서운했지만, 그럼에도 히딩크에게서 정말 많이 배웠다며 자신의 평생에 가장 존경하는 감독이자 롤모델로 히딩크를 뽑았다. 선수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하고 냉정한 분석력이 있으며 선수에게 끊임없이 다가서려 하는 면모를 특히 존경한답니다.

    

    이 중 박지성과는 말할 필요도 없이 서로 최고의 은사-제자라고 치켜세울 정도로 한국 선수들 중에서도 가장 총애하여 아직까지도 둘은 축구팬들에게 모범적인 사제지간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박지성이 에인트호번을 떠날 때 히딩크가 만류하며 섭섭해했다는 이야기가 나와 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아니냐 했지만 이후 박지성이 맨유에서 힘든 적응기를 겪자 언론을 통해 박지성은 훌륭한 선수이고 더 많은 기회를 받을 가치가 있다며 그를 끊임없이 옹호해주는 등 변함없는 애정을 과시했다. 아직까지도 볼 때마다 너무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제자라고 각별하게 생각할 정도랍니다.

    박지성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이 여러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히딩크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현한 바 있으며 항상 히딩크를 자신의 축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왔다. 박지성이 자서전에 쓴 내용에 따르면 부상당한 그에게 정신력이 훌륭한 선수라고 찾아와 칭찬을 해준 것이 자신의 남은 인생을 바꿔주었다고 할 정도랍니다.

    그만큼 히딩크 감독에게 심적으로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무명 선수와 다를바없는 박지성을 히딩크가 월드컵 전부터 끊임없이 칭찬하고 언론의 비난세례를 받아가면서까지 그를 기용하고 지지해주었던 점을 생각하면 둘이 서로를 각별하게 최고라고 칭찬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박지성이 은퇴하기 전 히딩크에게 미리 통보를 했는데 흔쾌히 지지해줬다고 한다.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씨 역시 박지성에게 히딩크는 그의 재능을 알아봐 준 감독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연락을 자주 하고 잊을 수 없는 감독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 고마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은퇴식에서 박지성은 인생 최고의 감독으로 히딩크를 꼽으며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감사하고 있다고 인사했답니다.

    한국 요리는 그다지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갈비와 생선전 외에는 좋아하는 한국 요리가 없다고 한다. 그 중에서는 산낙지를 매우 질색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한국이 결승에 진출하면 먹겠다고 말한 적은 있었다. 의외로 마늘은 스테미너에 좋다고 해서 좋아했는데, 선수들과 고깃집에 갔더니 외국 사람은 마늘을 싫어할 거라 생각한 주인이 안 주는 바람에 따로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생마늘을 쌈장에 찍어먹는 스타일이 아니라 고기랑 같이 구워먹는걸 즐겼으며 이는 자서전에서도 언급되었답니다.


    2014년 1월 5일, 무릎 관절 수술과 복부지방제거, 이마거상수술을 받기 위해서 방한한다고 하며기사 연인 엘리자베스도 따라왔다. 이후 홍명보 감독을 포함한 축협 간부들이 총출동하여 병문안을 가는 진풍경이 나왔고, 히딩크 감독도 한국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첫 경기 러시아전을 최소한 비겨야 할 것이라는 조언을 하였다. 그리고 정말로 비겨서 승점 1점을 획득했다.

    한국이 처참하게 월드컵을 마무리한 후에 올스타전과 박지성 결혼 때문에 방문했을 때는 한국 팬들이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투의 인터뷰를 했다. 정 아니면 자신이 했던 것처럼 장기 합숙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하답니다.

    2014년 연말에 네덜란드 국왕과 함께 방한했다. 경제 사절단 담당 특사 자격으로 왔고, 양국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도 배석이 되었답니다.

    나이가 들면서 무릎이 좋지 않아 한국에서 줄기세포 치료를 받았다. 상태가 심각해서 한동안 휠체어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현재는 골프칠 때 카트 타지 않아도 될 정도로 회복을 했다고. 여러모로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2016년 10월 한국 방문에서는 미친 포텐을 터트리고 있는 손흥민에 대해서 프리미어리거 수준을 넘었다고 호평해 주었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