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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나이 부인 아내 조무하 프로필 암 별세 고향 학력 가족
참아남
2024. 9. 22. 11:31
출생 나이 생년월일
1945년 12월 27일
고향 출생지
경상남도 밀양군
사망일
2024년 9월 22일 (향년 78세)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국립암센터
학력
한림국민학교
진영중학교 (졸업)
한얼고등학교 (전학)
마산공업고등학교 (화공과 / 졸업)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중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배우자 부인 아내 와이프
조무하
자녀 가족관계
장녀 장하원
차녀 장보원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최종 당적
가락당
'영원한 재야' 장기표 암 투병 중 안타깝게도 별세…향년 78세
-2024. 9. 22.
영원한 재야'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이 22일 별세했습니다. 향년 78세.
유족 등에 따르면 장 원장은 담낭암 투병 끝에 이날 오전 1시 35분께 입원 중이던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고인은 두 달여 전인 지난 7월 1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병원에서 진찰받은 결과 담낭암 말기에 암이 다른 장기에까지 전이돼 치료가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며 "당혹스럽지만 살 만큼 살았고, 한 만큼 했으며, 또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어려운 사정에서도 물심양면의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갑자기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 정말 죄송하다"고 썼다.
1945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고인은 마산공고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과 노동 운동에 투신하면서 1995년에야 졸업했습니다.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을 시작으로 민청학련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민중당 사건 등으로 9년간 수감 생활을 하고 12년간 수배 생활을 하는 등 1970~80년대 수 차례 투옥과 석방을 거듭했고, 12년간 수배 생활을 했다.
숱한 수감·도망 생활에도 민주화 운동에 따른 보상금을 일절 수령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9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국민 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 안 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970년 전태일 사후에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와 만나 시신을 인수하고 서울대 학생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데 앞장섰다.
이후 전태일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조영래 변호사에게 전달해 '전태일 평전'을 만드는 데 기여했고, 지나 2009년에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냈습니다.
고인은 이 여사와는 한동안 도봉구 쌍문동 같은 동네에 살며 노동운동을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여사는 세상을 떠나던 2011년 "기표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진실하고 바르게 살려는 첫 사람이자 나에게는 영원한 스승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1980년대부터 재야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떠오른 그는 1984년 10월 문익환 목사를 의장으로 종교인, 변호사, 퇴직 언론인 등이 참여하는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후 국민회의와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의 통합을 이끌어 민주통일민주운동연합(민통련)을 창립했던 것입니다.
1990년에는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재오 전 의원, 김문수 현 고용노동부 장관 등과 함께 민중당 창당에 앞장서면서 진보정당 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개혁신당, 한국사회민주당, 녹색사민당, 새정치연대 등을 창당했다.
하지만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15·16대 총선과 더불어서, 2002년 재보궐, 이어 17·19·21대까지 7차례 선거에서 모두 떨어졌다. 21대 총선에서는 현재 보수정당(현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 후보로까지 옮겨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국민의힘을 탈당해 특권폐지당 창당을 추진하던 중 원외 정당 가락당에 합류해 가락특권폐지당으로 22대 총선에 후보를 냈으나 원내 입성에 실패하고, 세 차례 대선에도 출마를 선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한평생 노동·시민운동에 헌신했음에도 결국 제도권 정계로는 진출하지 못해 '영원한 재야'라는 별명을 얻었다.
최근에는 '신문명정책연구원'을 만들어 저술과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 등에 집중해왔습니다.
지난해부터는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로도 활동하며 국회의원의 면책·불체포특권 폐지, 정당 국고보조금 폐지, 국민소환제 도입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지난해 1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일생의 목표가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루지 못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의 자아실현을 통해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 잠재된 소질과 취향을 실현해야 사람은 행복해진다"면서 "사회적으로 대한민국이 엉망진창이다. 정말로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무하 씨와 딸 하원, 보원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차려질 예정이며, 조문은 오후 2시부터다.
장례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26일, 장지는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이랍니다.
7번째 도전.. 통합당 후보로 김해을 출마하는 '영원한 재야' 장기표
-2020. 3. 6
장기표(75) 전 전태일재단 이사장이 6일 미래통합당의 4월 총선 공천에서 경남 김해을 후보로 확정됐습니다. 노동운동과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 인물인 그가 30년 정치 인생에서 6번 낙선 후 7번째 도전하는 총선을 보수 정당 후보로 치르게 됐다.
경남 김해 출신인 장 전 이사장은 마산공고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서울대 법대 학생회장을 지낸 그는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이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1971년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으로 복역한 것을 시작으로 김대중 납치사건 규탄, 유신독재 반대 시위,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여러 차례 투옥과 석방을 거듭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로는 재야 세력이 결집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주도하는 40대 4인방 중 한명으로 활동했다.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이재오 전 의원, 고(故)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함께였습니다.
장 전 이사장은 1990년 김문수 전 경기지사, 이재오 전 의원 등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했다. 장 전 이사장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중당 후보로 서울 동작갑에 출마해 21% 득표율로 얻었으나 낙선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통합당 김용태 의원 등이 그의 선거운동에 자원봉사자로 나섰습니다.
김영삼 정권 출범 후 김 전 지사와 이 전 의원은 집권 신한국당에 영입됐다. 그러나 장 전 이사장은 통합민주당에 합류했던 것입니다. 이후 1996년 15대 총선 때 다시 동작갑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민주국민당 창당에 참여했고, 전국구(현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2년 8월 재·보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영등포을에 출마했고 2004년 17대 총선에선 녹색사회민주당 후보로 다시 동작갑에 출마했으나 모두 패했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는 정통민주당에 합류해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답니다.
장 전 이사장은 21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소리당 창당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 후 자유한국당과 새로운보수당 등이 참여한 중도·보수 혁신통합추진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장 전 이사장은 지난달 17일 열린 미래통합당 출범식에 참석해 황교안 대표와 심재철 원내대표, 정병국 의원, 이언주 의원 등과 함께 연단에 섰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