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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프로필 비서실장 나이 근황 고향 사위 부인 아내

참아남 2022. 8. 19. 16:46



박정희 정부의 태동 이래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곡을 거치며 법과 권력의 막후를 줄곧 지켜왔다.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2대에 걸쳐 권력의 핵심으로 활약했습니다.


1939년 11월 25일 경상남도 거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법학과 재학중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고 34세 때 육영수 여사 살해범인 문세광씨 담당검사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박정희 정부에서 중앙정보부 수사국장과 청와대 법률비서관을 지냈고 노태우 정권에서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다. 유신헌법 마련과 공안정국 지휘, 탄핵 관련 원칙 수립 등 한국사회의 중요한 법률적 기틀을 만들고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답니다.

신한국당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3선 의원을 지냈으며 17대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후보 경선 선거대책본부 법률자문위원장을 맡았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도운 대표적 원로그룹인 ‘7인회’ 소속으로 박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잘 아는 최측근으로 평가받았고 75세로 최고령 비서실장이 됐습니다.

김기춘은 박근혜 게이트의 주요사건들을 기획하고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문화계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하고 보고를 받은 직무방해죄와 이의 집행을 압박한 강요죄, 국회청문회에서 위증죄 등으로 박영수 특별검사에게 기소돼 2017년 3월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답니다.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고 강력한 조직 장악력과 꼼꼼한 일처리로 유명하다.

- 경력 이력 누구

1960년 대학 3학년 재학생 신분으로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1963년~1964년 해군 해병대 법무관으로 근무했습니다.

1991년~1997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정수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은 졸업생 모임인 ‘상청회’ 회장을 지냈다.

1965년 광주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1967년 부산지검 검사, 1969년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71년 8월 법무부 법무과 검사로 발령이 났다.

1972년 유신헌법 제정 실무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 등 핵심조항이 담긴 유신헌법 초안작업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73년 법무부 인권옹호과 과장으로 특진했다. 곧이어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보좌관으로 발탁됐다.

1974년부터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 중앙정보부장 비서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내며 공안통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 담당검사로 육영수 저격 사건을 맡았다. 범인인 문세광씨의 자백을 받는 등 이 사건 수사에서 세운 공으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승진했다.

1979년 청와대 법률 비서관을 지냈다. 이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답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법무부의 출입국관리국장 등을 역임했다.

1988년 노태우 정권하에서 검찰총장이 됐다. 1990년 2년 임기를 마치고 총장에서 물러났습니다.

1991년 법무부 장관이 됐다.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수사를 총지휘했다.

1993년 김기춘법률사무소를 개소하여 변호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 신한국당의 공천을 받아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2000년과 2004년 선거에서 당선되며 3선 의원이 됐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탄핵심판 때 검사 역할을 했답니다.

2008년 국회의원 공천에서 떨어졌다. 2009년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2012년 제3대 이사장으로 재선임됐다. 2013년 7월부터 8월까지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2013년 8월5일 교체된 허태열 비서실장 후임으로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됐습니다.


2015년 2월17일 비서실장에서 물러났다.

2016년 9월1일 농심 비상임법률고문에 위촉됐다. 2016년 11월24일 박근혜게이트 파문과 관련해 고문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 학력

1958년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해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196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형사법 석사과정을 밟았다.

198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형사법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 가족관계

서울법대 동기동창의 동생이자 박찬일 변호사의 딸인 박화자씨와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습니다.

아들 김성원씨는 의사고 첫째 사위는 변호사이며, 둘째 사위는 대통령직인수위 고용복지분과 위원으로 활동한 안상훈 서울대 교수랍닏.

- 과거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6개월 만에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 등 박근혜 정부의 인사마다 문제가 드러나 분위기 쇄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은 상황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이 됐다. 그러나 유신으로 회귀하는 것이냐는 말도 나왔습니다.


김기춘은 시계를 40여 년 전으로 되돌려 곳곳에서 박정희 시대를 재현하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2017년 특검 수사에서 밝혀진 김기춘의 블랙리스트 작성 지시, 세월호 기록 은폐시도도 권력에 비판적인 국민을 적으로 규정하던 유신시대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는 김기춘 만큼 든든한 비서실장이 없었을 법하다는 관측이 나왔다. 박 대통령에게 김기춘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준 사람'이었다. 김기춘이 검사시절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수사해 저격범 문세광씨를 사형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랍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은 ‘주군과 신하’의 관계에 가까웠다. 실제로 2017년 1월 이혜훈 바른정당 의원은 "김기춘은 박근혜 대통령이 같이 없어도 '주군'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으며, '하명'이라는 단어도 쓰더라. 충격이었다"고 밝혔습니다.

- 이명박 정부, 친박계 인사로 와신상담했던 과거

김기춘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전 2007년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의 17대 대선 경선캠프에 법률지원단장을 맡았습니다.

2008년에 출범한 이명박 정권에서 김기춘은 나이(70세)가 많다는 이유로 국회의원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 출마도 포기했다. 공천권을 쥔 이명박 측의 ‘친박 대숙청’ 대상에 속했기 때문이다.

김기춘은 2009년에 비영리 공익법인인 한국에너지재단의 이사장이 되면서 정치인으로서 정체기에 놓인 것으로 보였다. 2009년 10월에 미공개 회고록인 '오늘도 내 인생의 마지막날인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 일명 노무현 정부의 저격수

김기춘은 노무현 정부에서 한나라당의 원로의원으로 저격수 역할을 했다. 김기춘은 참여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외에도 노무현 대통령을 놓고 “자기 감정도 조절하지 못하고 자제력이 없는 사이코”라고 비난했습니다.


김기춘은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김기춘은 한나라당 등의 막강한 지지를 등에 업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심판에서 국회 탄핵소추위원단장을 맡았다.

김기춘이 헌법재판소에 소추안을 제출함으로써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시작됐다.

- 김영삼 정부, 김기춘의 정치인 입문 내용

김기춘은 1992년 초원복집 사건으로 정치인생이 끝날 뻔 했으나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3년에 위헌제청을 내 ‘공소취소’를 받으며 부활했다.



김기춘이 정치인으로 본격적으로 첫발을 내딛은 것이 바로 이때다. 김기춘은 김영삼 대통령의 당이었던 민자당 국책자문위원으로 위촉됐고 1996년에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2004년까지 연달아 당선돼 3선 의원이 됐습니다.

- 고위 법조관직 승승가도했던 시절

김기춘은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1985년에 검찰총장이 됐다. 김기춘은 검찰총장 재직 시절 1990년에 ‘5·16 민족상(안전보장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기춘은 5공 시절의 '소외된 자'로 평가됐다. 따라서 노태우 정부의 ‘5공비리 청산'을 지휘할 적임자로 여겨졌다. 김기춘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비롯해 5공 인사 49명을 구속했고 법무부장관으로 승진했다.


김기춘은 노태우 정부의 공안정국을 기획하고 진두지휘한 장본인이다. 공안정국이란 용어는 1989년 노태우 정부가 보수적 지배체제로 돌아가기 위해 조성한 강압적 정치국면의 의미로 처음 쓰인 고유명사였다. 이후에는 반공주의로 진보세력을 탄압하는 것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됐습니다.

노태우 정부에서 학생운동권과 재야세력들은 독자적인 통일논의에 적극 나섰다. 서경원 의원, 문익환 목사, 임수경 당시 외국어대 학생의 방북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탄압은 91년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 수사로 정점을 이루었는데 김기춘은 당시 법무부장관으로서 공안정국을 이끌어갔답니다.

- 전두환 정부에서는?

김기춘은 10.26 몇달 전에 신직수 대통령 법률특보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 법률비서관에 앉았다. 이에 따라 운좋게 화를 면하고 이후 검찰로 복귀해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맡았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에서 입지는 예전같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 뒤 첫 검찰인사에서 허화평 대통령보좌관은 김기춘 공안부장을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하도록 해 해임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기춘은 박철언 청와대 정무비서관에게 구명을 요청했고 허화평 보좌관에게도 절절한 내용의 편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김기춘은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으로 발령났습니다.

김기춘은 그 뒤 이철희-장영자 사건에서 ‘이철희에게 초점을 맞춰 수사한 것은 대통령 지시 때문’이라고 국회에서 보고했다가 다시 한 번 위기를 맞을 뻔 했다. 하지만 박철언씨가 또 도와준 덕에 법무연수원 연수부장으로 발령이 났고 이후 대구지검장에 올랐습니다.

- 박정희 정부의 법률봉사란?

박정희 대통령은 거침없고 충성스런 김기춘을 아꼈다. 김기춘은 '주군' 박정희에게 충성을 다해 유신의 기틀을 놓고 유신의 통치방식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김기춘과 박정희 정부의 인연은 김기춘이 대학원 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기춘은 해군 법무관 훈련 중에 5·16 군사정변을 맞았고 이후 ‘5·16장학금’(정수장학금)으로 학비 걱정없이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문세광씨의 육영수여사 저격사건을 맡아 문세광씨의 자백과 이에 따른 사형선고를 이끌어냈고 박정희 대통령의 평가를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통해 김기춘 등에게 유신헌법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김기춘은 유신헙법 관련 외국자료를 연구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이어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11. 21)해 유신헌법을 제정-공포하고,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사실상 종신 대통령제의 시작이었다.


김기춘은 1974년에 중앙정보부에 파견되면서 본격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좌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최순실의 아버지인 최태민씨의 비리를 조사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당시 여학생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모함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10.26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의 범인인 김재규씨였다.



김기춘은 박정희 정부 내내 충실한 법률적 해결사였다. 1975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박정희 정부를 위해 재일교포 간첩사건을 수사했다. 2010년 국가기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작된 사건으로 결론냈고 피해자들은 2014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 그에 대한 평가

김기춘은 현장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노련한 법조인이라고 보는 평가도 있고 유신회귀와 권위주의 인사의 대표 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김기춘에 대해 사법부까지 이용해 정적을 제거하려 했던 ‘공작정치의 부두목’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을 받아 유신헌법의 법적 기틀을 마련했고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 등 여러 공안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공안정국을 이끌고 유지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들의 한 가운데 있었던 셈이랍니다.

김기춘은 평검사부터 검찰총장, 법무장관, 비서실장에 이르기까지 권력지향적인 행보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5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김기춘 실장은 “드물게도 사심이 없는 사람이라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높이 들었다.

김기춘은 비서실장 시절에 정부부처와 국회를 장악하고 여야 정치권과 창구역할을 도맡아 청와대 중심의 국정운영을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이 당시 ‘기춘대원군’이나 ‘왕실장’이란 호칭이 붙었다.

김기춘의 성격은 충성스럽고 조직을 이끄는 카리스마를 갖췄다고 알려졌다. 만사가 정확하고 꼼꼼한 편으로 유머감각도 있다고 한다.

주위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을 만큼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명하다. 집무실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70세에 이뤄졌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성당 벽화를 90세에 완성했으며, 괴테는 파우스트를 82세에 마쳤다’는 영어 문구를 걸어 놓았다.

잠시 자리에서 물러나 할 일이 없을 때도 옷을 다 차려입고 부인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건넨 뒤 2층 서재로 올라가 독서, 글쓰기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김똘똘’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적도 있습니다.

키는 165cm 내외로 추정되는데, 나이대를 고려하면 보통 키다. 몸무게는 62kg이라고 본인이 부산일보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습니다.

바둑 실력은 8급인데, 한국기원 부이사장을 역임한 바가 있습니다.

지난 2013년 비서실장 취임 당시 재산을 공개했는데, 당시 재산이 39억 원이었다. 야인시절에는 거물급 변호사로 일했기 때문에 예금성 자산(약 30억 원)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평창동 자택과 바로 옆집인 아들네 집까지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불성실 신고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사실 저걸 재산이라고 공개하는건 말도 안되는게 평창동은 고급주택가인데다 그의 평창동 자택은 여러 차례 기사화됐다시피 32억원짜리랍니다.

엄청난 자산가가 아니고서야 재산의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게 부동산인데 그걸 제외하고 계산한다는게 애초에 말이 안된다. 순수 예금만 30억원이면 오히려 부유층이랍니다

시간관념이 매우 철저하다고 한다. 법무부장관에서 물러나 집에서 야인으로 지낼 때도 짜놓은 시간에 맞춰서 움직였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집 2층 서재로 출근했는데, 이때도 정장을 했다고 한답니다.


본인이 맡은 자리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자리로 KBO 총재를 들었다. 그 당시 한일 슈퍼게임 참관차 일본을 방문하고는 도쿄돔을 보고 감명을 받아 돔구장 설립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외국인 선수 제도도 검토하긴 하지만 본격적인 외국인 선수 제도 도입은 그가 물러난 이후에 도입되었답니다.

KBO 총재 시절 선동열을 주니치 드래곤즈에 보내는 것을 꺼리던 해태 타이거즈 구단주를 설득, 일본에 진출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동열이 김기춘을 고맙게 생각하고 교분이 있다고 한답니다.

정치 행보는 사악하지만 인격은 매우 예의 바르고 교양이 있다고 한답니다. 또한, 처세술에도 능통했다.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엮이지만 않는다면 나쁘지는 않은 사람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이철희 의원도 썰전 패널 시절 그렇게 증언한 바 있답니다.

영화 자백에 출연한 모습에서도 잠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부부동반 일본 나들이를 위해 온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끈질기게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을 캐묻는 최승호 피디에게 정중한 목소리로 "모릅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라고 사실을 부인하면서도 끝까지 분노를 감추었다. 같은 영화에 비슷하게 강제 출연한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의 피의자인 전 국정원장 원세훈이 역정을 내는 것과는 대조적이랍니다.

이런 점이 바로 김기춘이 오랫동안 버틴 비결이다. 반면, 리틀 김기춘으로 불리기까지 한 정치검사였던 우병우는 상대에 대한 태도로 잠재적인 적을 만들었으며 결국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해서 검찰을 떠난다. 김기춘은 적어도 겉으로는 주위에 친절하여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암흑기 때 한직에서나마 살아남았고,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까지 지낼 수 있었던 것이랍니다. 

검찰 후배이자 같은 친박 정치인의 전 대법관 안대희는 "내가 아이큐 130인데, 김기춘은 170이다"라고 김기춘을 높이 평가했다. 또 다른 검찰 후배이지만 정치적 성향으로 정반대인 금태섭은 "김기춘은 항상 권력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이인자에 만족했기 때문에 장수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즉,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최순실의 전횡을 막지 않고 최순실에 이어 이인자 노릇을 하면서 권력을 공유했기 때문에 비서실장으로 오랫동안 재임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랍니다.

예를 들면 포스코 회장을 뽑을 때 자신이 추천한 인사를 접고 최순실이 미는 인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어찌보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김기춘은 최순실이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핵심 부서 검사로 재직했고 검찰총장, 국회의원까지 역임했는데 같은 엘리트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한 사람도 아닌 사이비 교주 밑에서 명령을 듣는다는 것은 어지간한 정신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답니다.



조응천이 초임검사 시절(1992년) 김기춘이 법무부 장관이었는데, 그 당시 조응천에게 김기춘은 "검찰에서는 거의 레전드급" 같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의 발언 하나하나를 교과서 같은 말로 여겼다고 한다. 김기춘과 조응천은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하게 되었으나, 2014년 정윤회 문건 파동을 계기로 조응천이 쫓겨나면서 둘은 완전히 원수지간이 된답니다.

그리고 지난 2016년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원이 된 조응천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김기춘을 비난하였다. 동아일보 김기춘 본인 퇴진설의 실상을 조사하라고 조응천에게 지시했는데, 조응천이 보고한 바로 그 문건을 누군가에게 넘겨버렸다고 한답니다.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합류하기 전 야인 시절에 전립선 비대증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청와대가 구매한 약물 중 전립선 비대증 치료제인 프로스카는 김기춘이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탈모증에도 약효가 있기 때문에 차은택설 같이 온갖 억측이 나오는 모양이랍니다.

지난 2016년 12월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여러 의원의 질문 공세를 피했으나, 막바지에 주*갤*리에게서 증거 자료들을 받은 박영선 의원에 의해 최순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기사에 따르면 청문회 이후에 박영선에 대해서 울분을 토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문회가 끝난 이후 박영선 의원석을 찾아가 공손하게 악수를 청했답니다.

자신의 약점을 온 국민 앞에서 동영상을 틀어 밝혀낸 사람에게 다가가 악수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른다. "자기 속내를 100% 감출 수 있고, 속마음과는 정반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매우 음험한 남자다."라는 평가를 고려해 보면 그야말로 무서운 일이다. 수많은 높으신 분들이 자기 언행 하나 통제하지 못해 얼마나 낭패를 보는지를 생각해 보면 가히 놀라운 능력이다. 이런 자제력은 보통 자리가 높아지고 나이가 들수록 약해지는데, 김기춘은 온갖 고관대직들을 다 지냈고 2017년 시점에서 78세인데도 저 정도였으니 정치권의 핵심 인사로 계속 살아남은 것에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랍니다.

청문회 때 판사 출신 박범계 의원이 김영한 전 수석의 비망록을 언급하면서 "비서실장이 김영한 수석을 바보나 허수아비로 만들고 우병우 민정수석과 공모하여 문건 유출을 처리하고, 문제가 생기자 '국회 청문회 때 핫바지인 김영한 당신이 나가라'고 하였다. 이에 김영한 수석은 항명하고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원통함에 술을 마시다가 스트레스로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죄책감이 들지 않느냐"며 비망록에 있는 것을 모르쇠하는 뻔뻔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김기춘에게 질타하였답니다.

2014년부터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들어왔던 우병우의 일 처리 방식이 김기춘과 비슷하다고 해서 청와대 내에서는 별명을 '리틀 김기춘'으로 붙였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은 "김기춘이 최저임금 7% 인상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 2014년 6월 26일자의 내용을 거론하며 "박근혜 정부의 최저임금을 김기춘이 사실상 결정했다"고 비판했답니다. 

2017년 1월 27일 방영된 썰전에서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과 바른정당 이혜훈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김기춘이 국회의원 시절에 박근혜도 같은 국회의원이었는데, 박근혜에 대해 주군(主君), 하명(下命) 등의 높임말을 썼다고 한답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 당시 박근혜와 김기춘의 발언이 재조명되었다. 당시의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는 "대통령은 탄핵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헌법재판소 결정을 수호할 의무가 있는 것이 대통령이다." 등의 발언을 했으며, 당시 국회 법사위원장 김기춘은 "대통령이 헌재에 불출석하는 것은 탄핵 사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탄핵 사태는 국회의 잘못이 아니라 대통령이 자초한 잘못이다.", "나라가 잘되는 것도 대통령의 공로이고, 이 같은 사태를 오게 한 것도 대통령의 책임이다." 등의 발언을 한 전적이 있답니다.

세월호 7시간 사건을 질의하던 당시 김기춘이 관저에 있었는지 집무실에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TV로 들었는데, 그는 박근혜보다 먼저 일어나 집무실에 가서 박근혜의 상태를 확인하고 사저로 물러나는 것을 확인하고 잠드는 사람이었다면서 그걸 아예 모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저 대화를 할 때까지 며칠이나 시간이 있었는데 다른 변명도 많은데 아예 모른다는 것은 진짜로 몰랐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고 한답니다.

처음에는 문고리 3인방 때문인가 싶었지만 전임이라면 모를까 김기춘이 그들에게 막힐 정도는 아니라면서 최순실에게는 그라도 꼼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검찰 수사에서 밝혀진 세월호 7시간 사건의 진상을 보면 당시 김기춘은 박근혜를 직접 만난 적이 한 번도 없고 제대로 된 연락도 되지 않았던지라 말 그대로 거짓말은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르고 유신 때 중앙정보부 수사국장이 사람이 고문도 많이 하고 했다니까 그런 사람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렇게 서바이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는 참 대한민국이 실망스러운 부분이라고 평했다. 참고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박영수 특검이 수사했는데 당시 수사팀장이 윤석열 검사였답니다.